학대받는 소녀의 부탁... "집에 가기 싫어요"

[리뷰] 사토 세이난이 쓴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등록 2012.02.23 12:28수정 2012.02.2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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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겉표지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겉표지 ⓒ 영상노트

영화 <똥파리>에서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성장하고 나서 상습적으로 아버지를 폭행한다. 억울한 과거에 대해 뒤늦게 보복하려는 듯이.

가정 내의 아동학대가 무서운 이유는 많다. 그 중 하나는 바로 폭력이 되물림된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시간이 지나고 성장하면서 가해자로 돌변한다.


성장한 피해자가 휘두르는 폭력이 가정 내에만 국한될 수도 있겠지만, 심한 경우 이들은 심각한 범죄자로 변한다.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은 어린 시절 가정에서 소외되거나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받아 온 트라우마를 앓고 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은 성인이 돼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그 상처의 아픔을 당사자가 참고 이겨낸다면 좋겠지만, 거기에 끌려다닌다면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의 삶도 함께 망가질 수 있다.

가정에서 학대 당하는 10세 소녀

사토 세이난의 2011년 작품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에서도 어린 시절에 학대받은 소녀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열 살의 소녀 아키. 아키가 가정에서 상습적으로 폭행당했다는 사실은 아주 우연히 발견된다. 정신과 의사이자 아동상담소 소장인 쿠마베는 어느날 소아과 의사인 친구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아키라는 이름의 여자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자신의 병원으로 실려왔는데, 신체를 검진한 결과 곳곳에서 폭행의 흔적이 발견됐다. 사고로 인한 부상자체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사고 결과 평상시에 학대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사고가 일종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아키의 외모는 마치 인형같다. 조막만한 얼굴에 아이답게 매끈한 하얀 피부, 유난히 크고 새까만 눈동자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콧날, 작고 귀여운 입술은 급식으로 나오는 빵을 잘게 찢어주지 않으면 넣지도 못할 것만 같다.

쿠마베의 눈에 비친 아키의 모습도 아주 의연해 보인다. 피학대 아동에게서 흔히 보이는 비굴함이나 성인에 대한 거부반응은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아키가 가지고 있는 가정에 대한 두려움은 감출 수 없다. 아키는 떠나려는 쿠마베의 옷깃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한다.


"나 집에 가기 싫어요."

쿠마베는 결국 아키를 가정에서 격리시켜 일시보호하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아키의 어머니는 이 결정에 반발하고 이때부터 쿠마베와 아키 가정의 갈등이 시작된다. 점점 깊어져가는 갈등은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끔찍한 사건으로 이어지고 만다.

되풀이되는 폭력의 악순환

작품은 쿠마베가 아키를 처음 만나고나서 10년이 지난 후에 시작된다. 어떤 남자가 10년 전 아키 사건을 조사하면서 당시 관련자들을 만나고 다닌다. 작품은 관련자들이 그 남자에게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의문은 크게 두 가지다. 아키 사건의 진상은 무엇일까? 10년 전 사건을 뒤늦게 캐고다니는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도 체벌을 통한 훈육의 전통이 남아있는 곳이다. 문제는 체벌과 학대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쉽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훈육할 생각으로 아이를 때리던 부모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학대를 하게 되는 사례가 많다. 아이를 가르칠 목적으로 매를 드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때리기 위해서 핑곗거리를 찾게 된다.

그렇다고 학대하는 부모가 마음이 없는 괴물은 아니다. 작품 속에서 한 남자는 가족을 폭행한 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빈다.

"내가 이렇게 된 건 나를 때린 아버지 때문이야."

이런 소리를 늘어놓으면 피해자의 마음이 약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때 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폭력이 반복된다.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에 대한 핑계만을 내세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정은 휴식의 장소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자 기다려지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집에서 학대당하는 아이들은 집을 거부할 것이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가정'이 가장 위험한 장소다.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제일 무섭게 느껴진다.

덧붙이는 글 |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사토 세이난 지음 | 이하윤 옮김 | 영상노트 | 2012.02 | 1만3000원)


덧붙이는 글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사토 세이난 지음 | 이하윤 옮김 | 영상노트 | 2012.02 | 1만3000원)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

사토 세이난 지음, 이하윤 옮김,
영상출판미디어(주), 2012


#아동학대 #사토 세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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