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오만한 소리꾼이었다"

[커피숍에서 만난 사람] 발라드 판소리 <별소릴 다하네> 소리꾼 김대일씨

등록 2014.02.28 16:34수정 2014.02.28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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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전주에서는 특별한 공연이 열렸다. '김대일의 발라드 판소리, <별소릴 다하네>'라는 작품으로, 별주부에게 꼬임을 당해 용궁으로 갔다가 간을 뺏길 뻔한 토끼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내용이다.

여기서 용궁은 선량한 서민들의 장기를 매매하는 회사 '파라다이스'로, 토끼를 꼬이는 별 주부는 '파라다이스'의 직원 별 부장으로, 하루아침에 간을 뺏길 뻔한 토끼는 공기청정기 회사 '작은 숲 속'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서민 '퇴대리'로 나온다. <수궁가>의 재해석인 셈이다.


소리꾼 김대일씨가 혼자서 판소리도 하고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3주간 (2월 7일~23일/전주 우진문화공간) 이 무대를 지켜온 소리꾼 김대일씨를 지난 19일 우진문화공간의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첫 질문은 가볍게 시작하려 했다. '공연 잘 관람했다. 공연 시작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 객석의 반응은 어땠나'였다. 김대일씨는 한숨을 쉬었다. 할 말을 찾고 있었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a  소리꾼 김대일씨

소리꾼 김대일씨 ⓒ 안소민


"뭐랄까... 야생이 된 기분이었어요. 비바람 부는 벌판에 버려진 기분? 그동안 온실 속의 꽃처럼 보호받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국악과 대중과의 거리감을 피부로 느꼈어요. 아! 이런 거였구나... 그동안 나는 너무 오만했고, 겸손하지 못했어요."

첫 질문부터 절절한 반성(?)이 이어졌다. 약 한 시간의 공연을 오로지 혼자 꾸려야 하는 1인극. 게다가 무대는 관객의 하품, 무료한 표정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소극장이다. 긴장하는 건 당연. 대일씨는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지 못하는 자신의 무대를 뼈저리게 느꼈음이 분명하다.

"공연한 지 열흘 정도 되었을 때에요. 공연 마치고 집에 와서 씻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내가 왜 이걸(발라드 판소리)한다고 했나... 이거 안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는데..."


관객이 알아서 오기만을 기다렸다

대일씨는 현재, 국립국악원 단원이다. 대학졸업 뒤, 비교적 수월하게 입단했다. 입단 후 정기공연과 기획공연으로 정신없는 6~7년을 보냈다. 대부분의 공연에는 일정 수준의 관객이 찾아왔다. 사랑받고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산이었음을 <발라드 판소리>를 통해 깨달았다.


"국립국악원이라는 곳이 그렇잖아요. 보존과 계승이라는 사명을 띠고 있는 국립 단체기관. 어느 정도의 관객은 확보된 상태죠. 그 안에 있다 보니 저는 그게 국악계 현실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이번 무대를 통해 깨달았어요. 흔히 '단 한 명의 관객이 왔어도 최선을 다해야한다'는 말 많이 하죠. 그런데 저는 그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어요. 관객이 한 명 올 때는 분명 그 이유가 있거든요. 관객이 안 온다고 불평할 일이 아니라 관객이 오게 만들어야 돼요. 그런데 국악은 지금까지 관객이 알아서 오기만을 기다렸어요."

대일씨는 '그동안 참 편하게 공연했다'고 했다. 이제는 국악인에게도 '스타성'이 필요하다는 걸 절감한다. 전통문화예술인의 '스타성'. 그러나 전통문화에서 대일씨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전통문화에 대해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전주다. 전주에서 나고 자라고, 소리를 배우고 지금까지 전주를 벗어난 적이 없는 대일씨. 전주에서 소리를 한다는 게 그에게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론 족쇄다. 동전의 양면, 양날의 검과 같다.

"일단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여건은 전국적으로 최고예요. 선생님도 많이 계시고. 소리 들을 수 있는 기회도 많죠. 이번 공연 관객 중 대전에서 오신 분이 있는데 그분이 말하길 대전 만해도 판소리 공연을 자주 볼 수 없다고 해요. 어쨌든, 전주에서 열리는 판소리나 국악 공연이 많다 보니 이 지역 사람들은 정작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 전주는 보수적이에요. 그러다 보니 창작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판소리 본고장 그러나 창작에 '인색'한 전주 

확실히 전주는 그런 곳이다. 변화를 마뜩잖아한다. 서울 경기에 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주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그러나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관객에게 다가서고 싶은 젊은 소리꾼에게 그것은 발목을 잡는 족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이번 발라드 판소리도 그런 의도에서 시작했어요. 사람들이 장르의 정체(?)가 뭐냐고 물어봐요. 판소리냐, 연극이냐고 묻는데 답은 없어요. 그냥 발라드와 판소리가 합쳐진 발라드 판소리에요. 요즘 사람들과 공감하는 노래를 하고 싶었어요. <미친광대(美親廣大)>를 결성한 이유도 그거에요. 제가 속한 단체에서는 할 수 없는, 보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작품을 하고 싶었거든요."

a  '발라드 판소리'라는 장르는 발라드(노래)와 판소리, 연극이 합쳐진 새로운 장르다. 연극으로 봐도 좋고 판소리로 봐도 좋다.  장기밀매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품은 <수궁가>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발라드 판소리'라는 장르는 발라드(노래)와 판소리, 연극이 합쳐진 새로운 장르다. 연극으로 봐도 좋고 판소리로 봐도 좋다. 장기밀매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이 작품은 <수궁가>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 우진문화공간


<심청가>에서 심 봉사는 정말 눈을 떴을까? 혹시 심청이의 상상 아니었을까? <춘향가>에서 성춘향은 정말 있었던 사람이었을까? 역사적으로 존재하는 '성희성'(이몽룡의 모델)이라는 인물에서 파생된 상상인물이 아니었을까? 이런 발칙한(?)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쓰고, 여기에 샹송이나 다양한 노래를 엮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이번 <별소릴 다하네>도 텔레비전에서 나온 장기밀매 뉴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호응은 좋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판소리의 전통을 흔들어 놓지 마라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판소리의 전통을 흔들어놓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옛것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만이 판소리를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잖아요. 저는 소리꾼의 한 사람으로서 판소리를 사랑하는 방법을 표현한 겁니다." 

a  이번 무대를 통해 소리꾼 김대일씨는 관객이 판소리 공연을 찾지않는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번 무대를 통해 소리꾼 김대일씨는 관객이 판소리 공연을 찾지않는다고 원망할 게 아니라, 관객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안소민


<별소릴 다하네>는 소리꾼 김대일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이번 작품을 계기로 그는 '소리 인생을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했다. 뻣뻣했던 목을 풀고 눈높이를 맞추려한다. 예전같으면 시큰둥했을 법한 무대라 할 지라도, 이제는 달려갈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건 소리 인생.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할 준비를 마쳤다. 
#발라드 판소리 #별소릴 다하네 #우진문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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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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