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운화상이 후백제 편에 선 거 알아?

[지리산 자락 남원에 풍기는 천년의 향기 ④] 실상사 1

등록 2014.04.27 09:36수정 2014.04.27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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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의 이쪽과 저쪽에 서 있는 장승

a  상원주장군

상원주장군 ⓒ 이상기


파근사지를 내려와 실상사에 이르니 오후 4시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실상사 입구 매표소에 붙은 안내판을 보니 실상사에는 지정 문화재가 무려 16점이나 있다. 오늘 우리는 그들 대부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들 문화재 중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석장승이다. 석장승은 해탈교의 이쪽과 저쪽에 3기가 있다. 원래는 다리 이쪽과 저쪽에 한 쌍씩 있었는데, 다리를 건너기 전 오른쪽 것이 홍수에 떠내려가 외짝이 되고 말았다.


이 해탈교 건너기 전 왼쪽에 있는 장승은 옹호금사축귀장군(擁護金沙逐鬼將軍)이다. 금모래 가득한 람천을 보호하고 악귀를 쫓아내는 장군이라는 뜻이다. 왕방울 눈에 주먹코, 양쪽으로 뻗친 송곳니로 무서움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높이는 2.9m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10m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는 두 장승은 대장군(大將軍)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이다.

a  대장군

대장군 ⓒ 이상기


여기서 장군은 도교에서 숭상하던 무장(武將)으로, 액을 쫓고 병을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그 중 상원은 선계(仙界)의 여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대장군은 남장승이고, 상원주장군은 여장승이다. 그래선지 대장군이 상원주장군보다 무서운 느낌이 든다. 대장군 받침돌에는 옹정(擁正) 3년이라는 명문이 보인다. 그러므로 1725년(영조 1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상원주장군에는 신해년(辛亥年)이라는 명문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장군보다 6년 늦은 1731년에 세워졌다. 두 장승의 높이는 2.5m 정도다.

실상사 오른쪽 산록 조계암터에 쓸쓸하게 서 있는 부도

우리는 장승을 지나 실상사 쪽으로 올라간다. 절 앞 연못에 실상사의 모습이 비친다. 비가 와서 그런지 차분하다. 우리는 실상사를 지나 조계암터로 올라간다. 그곳에 있는 부도를 보기 위해서다. 산기슭 한쪽에 4기의 부도가 있다. 종형 부도가 3기 있고, 향완형 부도가 1기 있다. 향완은 향을 담는 주발 형태의 공양구다. 이 부도는 향완 위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 연봉오리를 손잡이 형태로 조각했다. 부도의 받침 부분은 높게 만들어 화문(花紋), 운문(雲紋), 초문(草紋)을 조각해 넣었다.

a  조계암터 부도

조계암터 부도 ⓒ 이상기


이 향완형 부도가 편운화상 승탑이다. 그것은 몸돌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창건조사 홍척의 제자이며 안봉사(安峯寺) 창건조사인 편운화상의 부도. 정개 10년 경오년에 세움. (創祖洪陟弟子安峯創祖片雲和尙浮屠 正開十年庚午歲建)' 홍척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의 창건주 증각(證覺)대사다. 안봉은 편운화상이 창건한 절의 이름이다. 정개는 후백제 견훤의 연호로, 정개 10년 경오면 910년이 된다.


그런데 이 명문을 육안으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그럼 편운화상은 어떤 사람일까? 편운화상에 대해 기록을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다. 단지 수철화상탑비에 적힌 내용을 통해 그 행적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편운이 증각대사 홍척의 제자이기 때문에 수철과는 사형사제간이다. 일부 연구자료를 보면 수철이 실상사 제2조, 편운이 제3조로 나온다. 만약 편운이 실상사 제3조였다면 탑과 탑비가 제대로 갖춰져 있고, 탑의 형태가 홍척, 수철과 비슷해야 한다.

a  편운화상 부도 살펴보기

편운화상 부도 살펴보기 ⓒ 이상기


그러나 편운화상의 승탑은 홍척, 수철의 승탑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필자는 수철을 실상산문의 주류로, 편운을 비주류로 보고 싶다. 수철의 문인들이 주도하던 실상산문은 900년대에도 신라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달리 편운화상 문인들은 892년 새로 건국한 후백제 편에 섰다. 그리고 910년 편운화상 부도를 세우면서 후백제의 연호인 정개를 쓴 것이다. 그래선지 편운화상의 부도는 조계암터에 잊혀진 채로 쓸쓸히 서 있게 되었다. 실상산문의 비주류였기 때문이다.


한 번 비주류는 영원한 비주류인가? 편운화상 승탑은 그 역사성, 특이성, 예술성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고 있어 정말 아쉽다. 하찮은 문화재자료도 못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뚜껑 덮인 향완 모양의 승탑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유일무이성이 있다. 역사적인 면에서도 후백제 때 만들어진 게 확실하다. 또 예술적인 면에서도 고귀한 단순(Edle Einfalt)과 조용한 위대(Stille Gröβe)라는 서양 고전주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보물 정도로 지정해야하지 않을까? 

보광전 앞에 놓여진 쌍탑과 석등

a  보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

보광전 앞의 쌍탑과 석등 ⓒ 이상기


우리는 이제 사천왕문을 지나 실상사 경내로 들어간다. 정면으로 보광전이 있고, 왼쪽으로 극락전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장육전으로 알려진 전각터가 있고, 그 뒤로 명부전과 약사전이 위치한다. 보광전 앞에는 두 기의 석탑과 석등이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보물이다. 보광전 앞 동서 양쪽에 자리 잡은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그리고 상륜부 장식이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우주가 있고, 2층 기단에만 우주와 탱주가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네 귀퉁이가 살짝 들어 올려져 있다.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탑이 날렵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특히 탑의 상륜부 장식이 아름답다. 노반에서 찰주까지 거의 완형이기 때문이다. 이들 동서 쌍탑은 규모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a  실상사 석등

실상사 석등 ⓒ 이상기


석등 역시 통일신라 후기 작품이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기본적으로 8각 석등이다. 받침 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조각했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에 귀꽃이 있어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머리장식에도 여덟 개의 귀꽃을 붙였다. 전체적으로 화려한 장식과 조각이 두드러진다.

이 석등 앞에는 돌받침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석등에 불을 밝힐 때 올라가는 석조물로 여겨진다. 석등에서 바라보면 보광전이 바로 앞에 있다. 보광전은 현재 실상사의 주전임에도 불구하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아담한 건물이다. 그것은 보광전이 조선 후기인 1884년에 다시 지어졌기 때문이다. 보광전 주변 사역으로 보아 보광전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큰 법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a  보광전 불상

보광전 불상 ⓒ 이상기


보광전에는 아미타불을 주존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이 중 아미타불은 조선 후기, 관세음보살은 조선 전기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관세음보살이 건칠불이라고 한다. 건칠불은 종이와 천으로 불상의 틀을 만들고 거기다 옷칠을 한 불상이다. 건칠불의 겉은 금칠을 했다.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은 입상으로 거의 같은 모습이다. 높이가 178㎝로 아미타불 양쪽에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약사전 철불에서 느껴지는 힘 그리고 부조화

나는 이제 칠성각과 명부전을 지나 약사전으로 간다. 약사전은 조선 중기의 건물로 실상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러나 해충 피해와 노후화로 인해 최근 건축부재의 대부분을 새로 해 넣었다. 자료를 보니 지난 1월 19일 해체보수 불사를 마치고 회향 법회를 가졌다. 그 때 약사전에 있는 약사여래불(철조여래좌상) 부식방지를 위한 보존처리작업도 함께 끝내고 점안식도 가졌다고 한다.

a  실상사 약사전

실상사 약사전 ⓒ 이상기


약사전 외부에서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꽃창살과 편액이다. 꽃창살은 전각의 가운데 칸 문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6개의 꽃잎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꽃의 색깔도 붉은색, 파란색, 흰색 세 종류다. 약사전이라고 쓴 편액은 전서체 느낌이 조금 난다. 글씨를 쓴 사람은 모르는데, <한국의 사찰문화재> 책자에 보니 1821년에 썼다고 한다. 위쪽의 편액과 아래쪽의 꽃창살이 잘 어울린다.
  
실상사 안에는 철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9세기 초·중반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초기 철불이다. 길고 거대한 상체에 비해 가부좌한 하체가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얼굴은 신체에 비해 크고 둥글며, 코와 입이 상대적으로 작게 표현되었다. 그 때문에 약간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얼굴에 비해 신체는 다소 볼륨감이 떨어지지만, 대의의 옷주름을 양각으로 표현해 역동성을 살렸다. 이 불상은 신라말에서 고려초로 넘어가는 시기의 대표 철불로 볼 수 있다.

a  약사전 철불

약사전 철불 ⓒ 이상기


실상사 철불은 약사전에 모셔져 있기 때문에 약사여래 부처님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부처님은 약그릇을 갖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미타 수인을 하고 있다. 또 일부 학자는 이 철불을 통일신라 말 구산선문에서 본존으로 모시던 노사나상으로 보기도 한다. 실상사 철불은 약사전이 중창되기 전 들판에 있었다고 하며, 약사전 중창 후 전각 안에 봉안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철불에는 보화가 많이 들어 있다는 소문이 퍼져 도굴꾼에 의해 훼손된 적이 있다. 이번에 불상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복장유물로 철제 수인과 서적류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철제수인을 철불 옆에 전시하고 있다. 현재 철불의 두 손은 나무로 만들어 끼워 넣은 것으로 1987년 복원하면서 만들었다. 대좌는 원래 흙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번에 수리를 하면서 목재로 대체했다.

a  주악비천도

주악비천도 ⓒ 이상기


철불을  보고 나오다 나는 벽에서 주악비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천녀가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이다. 약사전이 조선 중기에 지어졌으니, 주악비천도도 그때 함께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전을 나온 우리 일행은 석둥과 석탑을 지나 극락전으로 향한다. 극락전 가는 길에는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이제 정말 극락세상으로 들어가는가 보다.
#실상사 #장승 #편운화상 부도 #쌍탑과 석등 #약사전 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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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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