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버링겐 충돌사고와 세월호 참사, 유사점과 차이점

어떤 복수 - 비탈리 칼로예프(Vitaly Kaloyev) 이야기

등록 2014.09.10 17:47수정 2014.09.10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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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 삐- 삐- 삐- 충돌위험! 충돌위험! 충돌위험!"

갑자기 이탈리아 베르가모를 출발하여, 벨기에 브뤼셀을 향해 밤하늘을 날고 있던 DHL611편 보잉화물기의 공중충돌방지장치( TCAS, Traffic Collision Avoidance System )가 날카로운 경보음과 함께 충돌 경고신호를 울린다.

같은 시각. 저녁 8시 48분에 모스크바를 이륙하여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던 러시아 여객기( 바쉬키르 항공 2937편 투폴레프 Tu-154 ) 조종실 내부에서도 DHL 화물기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삐- 삐- 삐- 삐- 충돌위험! 충돌위험! 충돌위험!"

두 항공기 사이의 거리는 25Km. 서로 같은 지점을 향해, 같은 고도로 날고 있었던 것이다.

관제를 맡았던 스위스 관제회사인 '스카이가이드'사 소속 피터 닐슨은, 레이더 영상을 통해 이를 확인하고 뒤늦게 비상사태임을 깨닫는다. 그리고 러시아 여객기에 '즉시 하강'을 지시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여객기의 충돌방지장치는 피터 닐슨의 지시와는 정반대로 'Climb( 상승 )! Climb( 상승 )!'이라는 신호를 반복하고 있다.

"이런 젠장! 장치는 상승하라고 하고 관제사는 하강하라고 하는데, 대체 어쩌라는 거야?"


러시아 여객기 기장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우물쭈물 하고 있는 순간, 보잉화물기의 충돌방지장치는 'Descend( 하강 )! Descend( 하강 )!'을 지시했고 화물기 기장은 이 지시를 따른다.

피터 닐슨은 다시 한 번 다급하게 러시아 여객기에 '즉시 하강'을 지시했고, 마침내 여객기가 지시를 따르자 "오른쪽 2시 방향 1,1000m 고도에서 다른 항공기 접근 중" 이라고 알려준다. 그러자 여객기의 기장과 승무원들은 일제히 시선을 오른쪽으로 향하며 화물기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관제사가 엉뚱하게도 반대 방향을 알려준 것이다. 이제 두 항공기 사이의 거리는 불과 5Km. 둘 다 하강하고 있고, 음속보다도 빠른 시속 1,300Km의 무서운 속도로 서로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


"기장님! 기장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 10시 방향에 있습니다!!!"

뒤늦게 여객기 승무원이 기장에게 절규하듯 고함을 지르던 바로 그 순간, 화물기의 수직 꼬리날개가 러시아 여객기의 중간부분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며 동체를 두 조각으로 찢어버렸다. 사고 시간은 밤 11시 35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충돌했던 두 비행기는 추락하였고, 날이 밝자 지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두 항공기의 잔해 가운데 살아있는 생존자는 아무도 없었다.

a  위버링겐 공중추돌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위버링겐 공중추돌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이 이야기는 가상으로 지어낸 허구가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인 2002년 7월 1일, 실제로 발생했던 항공기 충돌사건이다. 그리고 두 항공기가 충돌했던 지점이 독일 남서부의 조용한 소도시인 위버링겐( überlingen ) 상공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버링겐 공중충돌 사건'이라고 부른다.

사고로 인한 희생자는 어린이 57명을 포함한 총 71명( 여객기에 탑승했던 러시아인 69명과 보잉화물기 조종사 2명 ). 두 비행기의 탑승인원 전원이 모두 사망한 끔찍한 참사였다.

훗날,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 NGC )은 실화를 바탕으로, '사상 최악의 참사 - 비극의 비행기 공중충돌'이라는 다큐멘터리로 이 사건을 재조명 하였다.

■ 사고 전 상황

조사결과 희생자의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었던 이유는, 러시아 중부 바쉬키리 공화국 출신의 학생들이 스페인으로 수학여행을 떠나기 위해 사고 여객기에 모두 함께 탑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a  당시 러시아 여객기에 탑승했던 어린이들

당시 러시아 여객기에 탑승했던 어린이들 ⓒ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원래 수학여행단은 일요일이었던 6월 30일,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에서 출발을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바쉬키리에서 탄 기차가 연착하여 모스크바에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출발 시점이 7월 1일인 월요일로 늦춰졌다. 때문에 셰레메티예보가 아닌 도모데도보 국제공항에서 출발하였고, 예약했던 비행기 역시 바쉬키르 2937편으로 바뀌었다.

■ 사고의 원인

사고의 결정적인 원인은 지상에서 관제를 맡았던 피터 닐슨의 실수 때문이었다. 원래 규정상 관제소에는 2~3인이 반드시 함께 근무해야 한다는 근무수칙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동료들이 휴식을 취하는 바람에 피터 닐슨은 사고 당일 혼자서 당직을 서게 되는데, 이는 '스카이가이드'사 관제사들의 암묵적인 관행이었다. 회사 측이 몇 년 동안이나 이를 모르는 체 묵인해왔던 것이다. 때문에, 두 구역을 동시에 관리하며 서로 다른 비행기 여러 대를 한꺼번에 관제해야 하는 상황이 피터 닐슨에게 벌어졌다.

갑자기 나타나서 착륙을 시도하던 또 다른 여객기인 에어로로이드 1137편을 관제하느라 그는 정신이 없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공항과 통화를 하는 전화시스템 마저 고장이 나서 점검 중이었고( 때문에, 다른 관제소에서까지 두 비행기의 충돌위험 상황을 발견하고, 사고 위험을 알려주려고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 혹시나 에어로로이드 1137편의 착륙에 문제가 생길까봐 신경을 온통 그쪽에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연유로 인해, 러시아 여객기와 보잉화물기가 충돌할 위험에 이르기까지 그는 전혀 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당황한 나머지 그는 러시아 여객기를 보잉화물기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래서 여객기의 공중충돌방지장치가 '상승'을 지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하여 고도를 낮추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화물기에는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두 항공기 모두에게 하강을 선택하게 한 결과,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더욱이 화물기의 방향도 10시가 아닌 2시방향이라고 잘못 알려주는 바람에, 여객기가 마지막으로 대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마저 없애고 말았다.

■ 비탈리 칼로예프(Vitaly Kaloyev)의 복수

희생자 대부분이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러시아 국민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아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우선 위버링겐의 충돌지점 아래에 추모공원이 조성됐다. 유가족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비통한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했다.

a  위버링겐에 세워진 추모공원과 희생자 명단

위버링겐에 세워진 추모공원과 희생자 명단 ⓒ 위키 백과사전


한 순간에 어린 자녀를 잃은 유가족들의 슬픔과 분노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확산되었고, 관제회사와 책임자를 즉각 처벌하라는 비난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자꾸 미뤄지기만 했다. 사과나 보상조치도 없었다.

독일과 스위스, 그리고 러시아에서 각각 따로 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작성했으나, 시간만 허비하며 점점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시작했다. 관제사의 실수 때문에 끔찍한 참사가 벌어졌다는 러시아의 주장에 대해, 스위스 측에서 반대 되는 주장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관제사와 TCAS의 지시가 엇갈릴 경우, TCAS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대응이다. 그런데 러시아 여객기 조종사는 관제사의 지시를 따랐다. 따라서 관제사의 지시를 따른 러시아 여객기 조종사들 책임이지, 관제회사나 관제사의 잘못이 아니다." 라는 주장이었다.

슬픔과 절망 속에서 점점 지쳐가던 유가족들 중엔, 스페인에서 건축설계사로 일하던 러시아 출신 비탈리 칼로예프( Vitaly Kaloyev )가 있었다. 1년 반이나 서로 떨어져 있는 동안, 늘 서로를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그의 아내와 두 아이들이 수학여행단과는 별도로 문제의 그 여객기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책임자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관제회사와 사고 책임자인 피터 닐슨은 아무런 사과나 유감을 표명하지도 않았고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었다.

마침내 사고가 발생한 이후 1년 7개월이 지난 2004년 2월, 칼로예프는 직접 수소문해서 스위스 취리히 근교에 있는 피터 닐슨의 집을 방문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그는 죽은 아이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닐슨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피터 닐슨은 그의 손을 쳐내며 아이들의 사진이 땅바닥에 떨어지게 했고, 자기 집에서 떠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그 순간 그만 이성을 잃고 격분한 비탈리 칼로예프는 그 자리에서 피터 닐슨을 칼로 찔러 살해를 하고 말았다. ( 훗날 칼로예프는, "아이들 사진이 땅에 떨어지자 마치 그가 아이들을 다시 한 번 죽인 것 아니냐는 느낌이 순간 들었고, 눈앞이 캄캄해졌으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나를 집에 들여보내서 이야기를 나누고 용서를 구하기만 했어도 이런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

살인죄로 칼로예프가 구속 기소되자, 러시아 국민과 언론들은 이 사건에 비상한 관심을 쏟는다. 당시 러시아연방의 자치공화국인 북오세티야 대통령은 동향(同鄕)인 칼로예프를 정신적으로 지원한다면서 직접 취리히를 방문해 재판 과정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아울러 선고 공판을 앞둔 시점에 모스크바 주재 스위스 대사관 주변, 그리고 북오세티야의 수도에서는 칼로예프의 무죄를 주장하는 러시아 사람들의 집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러자 스카이가이드사는 그때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유족들에 대한 공식 사과 성명을 발표한다.

이를 계기로, TCAS와 관제사의 명령이 상반될 경우 무조건 TCAS를 따르고 관제사를 무시하도록 국제적 표준규정이 마련되었고, 지상관제소의 관제사 근무규정이 강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위스 취리히 법원은 비탈리 칼로예프에게 징역 8년형을 선고했다. 원래 스위스 검찰은 12년형을 구형했으나, 정상참작이 되어서 형량이 줄어들었다. 나중에는 그나마 복역 기간이 채 4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 그는 여론의 압력에 힘입어 석방이 되었다.

칼로예프가 자유의 몸이 되어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한 순간, 공항에는 그를 따뜻하게 환영하는 러시아인들의 행렬이 길가에 까지 길게 늘어서서 그를 맞이했다. 그리고 2008년 11월, 그는 그의 고국인 북오세티야 공화국의 건설차관에 임명이 되는 인생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 위버링겐 충돌사고와 세월호 참사, 유사점과 차이점

가히 '러시아판 세월호 참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사고가 발생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 그리고 이후의 진행과정을 보면, 위버링겐 사고는 놀랍도록 세월호 참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우선 희생자의 대부분이 수학여행을 떠났던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오하마나호가 세월호로 변경되었던 것처럼, 러시아 여객기 역시 원래 예약했던 비행기가 아닌 다른 항공편으로 바뀌었었다. 게다가 진도VTS에서처럼 스위스 관제사들 역시 2인 이상 근무규정을 어기고 한사람만 근무를 했다. "관제소홀은 인정하나 형법상 무죄"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진도VTS 직원들과 마찬가지로, 피터 닐슨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지연되는 가운데, 오랜 시간을 허비하며 국민과 유가족들의 분노를 키우고 있는 점 역시 그대로 닮은꼴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비탈리 칼로예프는 직접 사고책임자를 칼로 죽였다. 반면에, 세월호 유가족들은 칼 대신 서명용지를 손에 들었다.

이미 485만명이 넘는 국민들이 세월호특별법 제정 서명에 동참했고, 전 세계 가톨릭계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세월호 유족들의 아픔에 지지를 표한 상황이다. 단독으로 사적( 私的 )인 복수에 나섰던 칼로예프와는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12년 전 비행기 충돌사고는 전혀 손쓸 틈이 없었던 반면, 세월호 참사는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희생자 전원을 구할 수 있었다. 한 민간회사와 개인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했던 위버링겐 사고와는 달리, 세월호 참사는 '정부에 의한 구조실패'가 그 핵심원인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도 목숨을 걸고 46일을 단식한 한 애끓는 부모의 호소를, 대통령은 차갑게 외면했다. 이어서 대통령의 제부라는 사람은 유가족들을 조롱하는 퍼포먼스를 감행했고, 인면수심( 人面獸心 )의 철없는 일베 무리들은 이른바 '폭식투쟁'을 하며 세월호 유족들을 '불순세력'으로 매도했다.

만약 그들의 의도가 진정 그런 것이라면, 언젠가 그들은 국민들에 의해 반드시 복수를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안전한 세상에 대한 갈망은 세월호 유족들만의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당연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아니, 국민들이 나서기도 전에 어쩌면 그들 스스로 무너지게 될지도 모른다.

국민을 억압하고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모든 권위주의적 위정자들의 말로가 어떠했는가? 박정희는 부하의 총탄에 의해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고, 그 뒤를 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역시 후임 대통령에 의해 감옥에 보내졌다.

세월호 정국에서 국민들의 분노를 쌓으면 쌓을수록, 여권 내부의 권력투쟁이 보다 앞당겨질 것이다. 여당내 차기 대권주자들이 끝까지 박근혜 대통령을 보호하며 방패역할을 할 수 있을까? 선을 긋고 외면하고 나서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일 뿐이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權不十年 花無十日紅 ). 아무리 붉고 탐스러운 꽃이라 하여도 열흘을 넘기기 어렵고, 제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라도 그 권세는 10년을 넘기지 못한다고 했다. 권력은 짧다. 박근혜 대통령이 부디 이 사실을 빨리 깨닫기를 바란다.
#세월호 #위버링겐 충돌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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