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저고리만 입는 여자들이 사는 섬

[책 뒤안길] 전아리 소설, 여인천하의 섬 <미인도>

등록 2015.09.12 10:48수정 2015.09.12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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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참 오랜만에 카타르시스를 맛보았다고나 할까요. 딱히 그게 '카타르시스'라 이름 붙여도 되는 건지 아리송하지만, 하여튼 비슷한 거였소. 연애소설 읽고 그랬다면 믿겠소. 이 나이에 무슨 남녀상열지사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소. 하지만 나이 먹었다고 남녀 간 연애사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 또한 거짓 아니겠소.

'로만 컬렉션(Roman Collection)'이란 이름의 시리즈물의 다섯 권째 작품이 전아리의 소설 <미인도>(나무옆의자 펴냄)인데, 거 참. 소재로 등장하는 춘화(春畵)만큼이나 스멀스멀하고 멜랑콜리한 남녀상열지사를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필휘지하고 있소.


이 시리즈물은 전아리 외에도 하창수, 한차현, 박정윤, 김서진 등의 작가에 의해 쓰였는데, 특이한 것은 이들 모두 순수 작가 군에 속한다는 거요. 이들은 이번 기획에서 그야말로 일탈을 꿈꾼 거라 할 수 있소. 남녀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미스터리 구조와 몽환적 사슬을 엮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상상의 나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오.

순수 작가의 야한 소설, 일탈에 심쿵하다

a  책 <미인도> 표지

책 <미인도> 표지 ⓒ 나무옆의자

특히 전아리는 중고등학생 시절부터 주목받은 천재 작가라오. 2006년 제26회 계명문화상을 받으며 주목을 받더니, 2007년 제3회 청년토지문학상, 2008년 제3회 대한민국 디지털작가상 대상을 수상하며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르더니, 같은 해 제2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화려한 경력 작가라오.

여보! 여자들만 사는 '미인도'라는 섬, 벌써 설정 자체가 몽환적이지 않소? 그 섬에서 벌어지는 로맨스. 여자들의 적나라한 질투와 벌거벗은 육신들의 몸짓,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화폭에 담는 춘화작가의 노근한 손짓. 이들의 몸짓과 손짓이 모여 그들만의 에로스 성(城)을 쌓아가는 모습은 또 하나의 얄궂은 낭만이라오.

"여자의 손끝은 그의 사타구니나 허벅지를 스칠 때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야무지게 살을 문질렀다. 짐짓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는 침묵 속에 요염함이 느껴졌다. 여자가 무언가를 집으려 그의 위로 몸을 기울이자 탱탱하고 보드라운 젖이 가슴팍에 닿았다. 평소라면 심장이 요동치고 맥박이 빨라졌겠지만 그런 격정과는 또 달리 그는 날짝지근한 황홀에 취해 있었다."(본문 28-29쪽)


문장이 착착 안기지 않소? 전아리 작가는 언론 인터뷰에서 "이 소설에 1년 6개월의 시간을 할애하며 공을 들였다"며, 따끈하고 현란한 문체를 위해 옛날 국어사전을 뒤적여 500개가량 단어를 뽑아 사용했다고 말하고 있소. 전 작가는 "영롱하고 전통적인 미를 살리려고 했다"고 강조했는데, 과연 책장을 넘기면서 이리도 아리따운 단어가 있었던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소.

전 작가는 김유정 소설을 연애소설의 전형으로 꼽고 있소. "징글징글하고 찰지고 구수하고 그런 것"이 로맨스 소설이라는 작가는 춘화에서 영감을 얻어 <미인도>를 그려냈다고 하오. 앞으로 "야한 단어는 하나도 나오지 않지만 야한 스릴러 소설"을 쓰겠다는 작가는 이번 <미인도>에서도 두 가지 모두 성공한 듯 보이오. 야하지 않으며 충분히 야한 소설과 스릴러에.


여보, '미인도'는 항상 봄이오. 이곳 여인들은 늙지 않소. 모두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소. 그림 솜씨 뛰어난 사내의 유입으로 인하여 모두 춘화 마니아들이 되오. 너도나도 자신의 장사 장면을 그려달라고 아우성인데. 춘화 하나로 이어지는 여인들의 음모와 질투, 그 내밀한 몸부림은 기억하지 말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소.

몽환적 일탈, 스릴러의 스토리텔링으로 충분하다

사고를 만나 들어온 사내들은 하룻밤을 자는 순간 그곳에서 살아야 하오.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대부분 상실하고 그곳에 남게 되는데. 그곳에서의 일을 기억할 것인지, 망각할 것인지 선택해야 할 때가 있소. 망각하지 않으면 80대 노인이 되는 것이오. 망각에 성공한 남자는 없소. 그러니 섬을 나오는 순간 노인이 되는 거지요.

여보! 섬은 그리 환상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소. 왜냐하면 정사를 나누는 순간 남자는 그들이 온 세상으로 다시 가야 하오. 그곳 여인들은 늙지 않지만 세상에서 사고를 만난 남자들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려야 하오. 한 남자가 들어오면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 악다구니를 치고. 몽환적이지만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미인도. 실은 세상이나 미인도가 그리 다르지 않소.

여보! 소설은 한 노인이 죽었다는 뉴스로부터 시작하오. 80대로 보이는 노인이 죽었는데, 글쎄 그 노인의 신분증은 대학생의 것이오. 미스터리는 여기부터요. 그의 친구라는 노인(성우)이 자신이 겪었던 죽은 노인, 아니 죽은 청년(종민)과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스토리텔링 형식이오.

이 세상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는데, 결국은 다시 그곳이오. 사랑이 넘치는 파라다이스, 첨에 미인도는 그렇게 출발하지만 규칙이 살벌하여 결국 그곳은 지옥이란 생각이 드오. 맘대로 자신이 흠모하는 여인을 품을 수 없는 섬, 몽환의 끝은 사뭇 철학적이오.

"아무리 이곳이라 해도 마냥 좋고 아름답기만 한 것이란 없다오. 때로는 꽃이 지기 전에 돌아서주는 게 꽃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소. (중략) 어떤 즐거움을 맛보든 맛보여주든 그건 그네의 자유이지만 이것은 명심했으면 좋겠소. 절대 이곳 질서를 흩트리려 하지 마시오."(본문 114쪽)

질서, 규칙, 그렇게 파라다이스(미인도)는 여느 세상과 다르지 않소. 몽환적 사랑의 자유를 만끽하려던 남자들은 망각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늙든지 해야 하오. 결국은 "애욕의 집착이라는 게 원래 그리 끔찍한 법 아니겠소? 그러니 또 재미가 있는 것이고"(167쪽)라고 말하는 가희가 맞소. 가희야말로 종민을 노인인 채로 다시 세상으로 내보낸 장본인이오.

여보! 가희와의 한 번 정사로 세상으로 다시 나온 종민은 결국 늙었소. 늙은 채로 죽었소. 성우 역시 노인이 되어 미인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스터리텔러가 되오. 망각이란 그리 어려운 것이오. "되돌릴 수 없는 일에 대한 기억이란 한낱 꿈과 다를 바가 없지 않겠소? 예전처럼 망각을 택하면 마음의 고통도 덜 수 있을뿐더러 그대의 젊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이오"(182쪽)라는 말. 그 어떤 남자도 이 말을 실천하지 못했소.

스릴 넘치는 필치로 엮어가는 낯선 섬에서의 연애, 급박함과 멜랑콜리를 뒤섞어 풀어놓는 감질 나는 정사, 찬찬히 줄을 바꿔가며 나긋나긋 써내려갔지만 결국 가슴 쥐며 읽어야 하는 소설이오. 통속적인 연애소설쯤으로 덤벼들어도 무방하긴 하지만, 감수성을 조금 발휘할 필요가 있소.

꿈과 연애 사이, 몽환과 현실 사이, 여인과 여인 사이, 남정네와 남정네 사이, 숲속의 노파들과 소경들 사이, 청년과 노인 사이, 미인도와 우리가 사는 보통 세상 사이, 춘화의 정사장면과 실제로는 이룰 수 없는 정사 사이 등등 소설의 설정에 젊음을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는지 꼼꼼히 따지며 읽을 필요는 없소.

그러나 여보! 감칠맛 나는 소설의 묘미는 느끼며 읽어야 할 의무가 있소. 몽환적이며 미스터리한 터치가 어디에 닿아있는지. 작가가 "영롱하고 전통적인 미를 살리려고 했다"는 말이 무엇인지 곱씹으며. 망각할 것인가, 늙을 것인가를 선택하며. 죽음을 모르는 세계에도 죽음이 있다는 걸 감지하면서.

"이곳 계집들은 늙질 않으니 죽음이란 걸 모르지. 소경들은 죽을 때가 되면 소리 없이 바다로 뛰어들어 사라져버리니 그저 제 살던 대로 떠났구나, 하고만 여기는 거야. 하지만 목이 베이거나 물에 빠지면 고 계집들도 영락없이 죽게 되어 있어. 아무도 죽음을 가르쳐주지 않아 다만 모르고 있을 뿐."(본문 84쪽)
덧붙이는 글 <미인도>(전아리 지음 / 나무옆의자 펴냄 / 2015. 8 / 188쪽 / 9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여보’는 제 아내만이 아닙니다. ‘너’요 ‘나’요 ‘우리’입니다.

미인도

전아리 지음,
나무옆의자, 2015


#미인도 #전아리 소설 #여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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