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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에 지친 청년, 괴물로 변한 엄마

[김성호의 씨네만세 721]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 '코리안시네마' <소용돌이>

24.05.16 14:11최종업데이트24.05.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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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얼마 보지 않는 편이지만, 꼭 챙겨보는 프로그램이 딱 하나 있다. ENA와 SBS PLUS 채널에서 방송되는 < 나는 SOLO >다. 십 수 년 전 군대에서 처음 보았던 S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짝>의 남규홍 PD가 연출한다는 소식만으로도 나는 이 방송 모든 회차를 찾아보았다. TV PD 가운데 이름을 알고 있는 이가 오로지 남 PD 뿐이니 내가 그의 팬이라 해도 좋을 테다.
 
내가 유독 이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는 것은 이 방송이 흔한 남녀상열지사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짝짓기 상황이 주는 자극적 재미를 넘어 선택의 기로에 선 인간이 저의 진면목을 내보이는 순간을 방송은 효과적으로 포착해낸다. 그와 같은 순간을 보고 있자면 이 프로그램의 진짜 관심이 무엇인지를 실감케 된다.
 
얼마 전까지 방송됐던 < 나는 SOLO > 19기가 꽤나 입소문을 탄 모양이다. 19기는 태어나 연애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소위 '모태솔로' 특집으로 기획된 모양으로, 통상의 경우보다 서툴고 민망한 장면이 제법 포착돼 화제에 오른 듯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두 남자 출연자가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39살의 영식과 30살의 영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시종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여성 출연자들에게 접근하다 비판의 대상이 됐다.
 

▲ 소용돌이 스틸컷 ⓒ JIFF

 
더 많은 이해가 주어져야 한다고
 
그러나 내겐 이들이 받는 비판과 비난이 몹시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이들에게 보다 많은 이해가 주어졌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놀랐던 건 이 같은 감상이 아주 개인적 차원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개인적 경험이 없었다면, 나 역시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조롱하고 비웃었으리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내가 두 출연자에게 더 많은 이해가 주어져야만 했다고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들의 배경이다. 이들은 < 나는 SOLO >는 물론, 그 이전 <짝>에서도 본 적 없는 독특한 배경을 지녔다. 다름 아닌 간병이다. 영식은 어머니가, 영호는 아버지가 암으로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한 이력을 갖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들은 직접 상당한 시간동안 간병을 감당했고, 이로 인해 연애를 하지 못하였다고 입을 모은다.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만난 단편 <소용돌이>를 보며 문득 그들이 떠올랐다. '코리안시네마 단편2' 섹션에 묶여 상영된 19분짜리 단편은 가족의 투병을 오롯이 감당하는 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 소용돌이 스틸컷 ⓒ JIFF

 
간병하는 청년들... 그들의 고립을 말하다
 
영화는 시작부터 기괴하고 을씨년스럽다. 벽지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은 집 가운데서 이어폰을 낀 사내가 죽을 끓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윤석(김원준 분), 고깃배 선원으로 일하는 아빠 대신 병에 걸린 엄마를 돌보는 중이다. 처음엔 그의 아빠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알 수 없는데, 이는 윤석이 귀에 이어폰을 끼고 있는 탓이다.
 
이어폰에선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간병하는 방법을 설명하며 용기를 불어넣는 짤막한 내용이 반복된다. 그러나 내용과는 대조적으로 그 목소리는 잔뜩 지쳐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햇살 하나 들지 않는 방구석처럼 탈출구 없는 간병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도록 한다.
 
엄마의 배엔 상처가 있고 윤석이 지혈하는 거즈엔 피가 가득 묻어나온다. 감염이 될까 염려되는 상처에선 진물이 흐르고, 아무리 깨끗하게 닦으려 해도 좀처럼 닦여지지 않는다. 약을 먹고 상처를 닦아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 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던지 윤석 또한 아버지처럼 생기가 하나도 없다. 고통스러운지 신음을 토해내는 엄마 곁에 누운 윤석은 거듭 악몽을 꾼다. 높은 파도로 아빠가 돌아오지 못하는, 엄마가 괴물로 변해 저를 습격하는 내용이다.
 

▲ 소용돌이 스틸컷 ⓒ JIFF

 
공포가 된 간병, 사회는 어디에 있나
 
영화는 청소년인 윤석이 겪는 간병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세상을 알기 전에 간병의 부담부터 지게 된 어린 아이,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국가도 사회도 얼마 보여지지 않는다. 그럼에 윤석에게 가장 큰 공포는 아빠가 사라지는 것, 그렇다면 저 혼자 엄마를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간병이 개인의 것으로 남겨지고, 남루한 방 안에 고립된 모습이 그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아 상당한 감상을 안긴다.
 
영화는 그저 윤석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윤석은 어쩌다 시간이 나면 집 앞 바닷가에 나가 먼 곳을 바라본다. 그곳엔 윤석 또래의 여자아이(이조화 분)가 커다란 바위를 줄로 묶어 당기고 있다. 어느 날인가, 여자아이가 윤석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그리고는 윤석을 제 집으로 데려간다. 그 집은 윤석의 집만큼이나 허름하고 기괴한데, 장막 너머 할머니처럼 보이는 노인이 죽어가고 있다.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모습, 죽어간다는 표현이 적확한 그녀의 죽음은 그러나 좀처럼 빠르게 다가오지 않는다. 달팽이처럼 서서히, 아주 느리게, 제 손녀의 피를 말리며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전작 <나니까 미에루!>를 통해 저만의 색깔을 인정받은 1998년생 장재우 감독이다. 장재우는 윤석과 소녀를 둘러싼 상황의 낯설고 기괴한 모습을 통해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시야를 얻지 못하는 이들의 사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 소녀가 끄는 거대한 바위는 모래사장에 소용돌이와 같은 문양을 그려낸다. 아무리 걸어도, 아무리 끌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이들의 상황이 소용돌이라는 상징 가운데 효과적으로 표현됐다.

가족 간병으로 집과 병원에 갇힌 이들이 수두룩한 세상이다. 그러나 그들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제 부모가 살아있어 연애마저 할 기회가 없었다고 토로하는 그 마음이 오죽한 것일까. 그러나 보통의 선한 시청자는 그 마음조차 돌아봐주지 않는다. 비난은 쉽고 이해는 어려운 탓이다.
 

▲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 JIFF

 
간호법 제정도, 통계도, 연구도 없는
 
연애뿐이었을까. 사회생활도, 인간 대 인간의 관계맺음도, 일상의 복잡다단한 수많은 경험들도 그들은 남처럼 누리지 못했을 테다. 고립되고 낙후되어 병자와 함께 침몰하기 십상이었을 테다. 그러나 정부는, 또 사회는 어떠한가.
 
간호간병 정책을 효과적으로 설계하는 첫 걸음일 수 있을 간호법 제정조차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한 차례 저지된 한국이다. 학자들은 가족 간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인구가 얼마인지, 그들의 실상은 어떠한지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지 않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관련 통계조차 내놓지 않고 있다. 간병은 오로지 개인의 탓으로, 윤석과 바위 끄는 소녀의 짐으로 남겨져 소용돌이 가운데로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있다.
 
<소용돌이>가 던지는 경고는 2024년 한국에 유독 아프게 들려온다. 한국 사회보장보험의 중심이라 해도 좋을 국민연금조차 미래 수급을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위태로운 오늘이다. 급증하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기타 여러 노인성 질병들이 수많은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갈 게 눈에 선하다.

사회보장은 부실하고 출산률은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가운데 겪지 않은 인간들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 보이지 않는다. 각자도생의 지옥도가 펼쳐질 날이 그리 멀지만은 않은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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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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