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장부들은 가라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다시 읽으며

등록 2002.10.15 10:04수정 2002.10.1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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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시인 신동엽은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에서 삶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열망, 우리의 삶 속에서 당연히 중심이 되어야 할 '알맹이'에 대한 희원(希願)을 노래했다. 알맹이와 대비되는 그 모든 '껍데기'들의 퇴치와 극복을 그토록 간단 명료한 언어로 절절히 갈망한 시는 일찍이 없었다.


한국 문단과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가 발표된 때는 1967년. 그때로부터 어언 30년하고도 수년의 세월의 흘렀다. 일약 한국 시문학의 하나의 금자탑이 된 신동엽의 그 시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이, 어쩌면 더더욱 빛을 발한다.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변함없이, 어쩌면 더더욱 빛을 발한다'는 말은 다분히 역설이다. 그것은 문학작품의 가치와 생명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릇 껍데기들의 완강한 생명력과 지속을 더 많이 의미한다. 변화와 발전을 포태하기 마련인 시간의 흐름을 마치 조롱이라도 하듯 한없이 무성해진 수많은 껍데기들의 창궐 속에서 신동엽은 오늘도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고 있다.

21세기의 현실 속에서 알맹이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수만 가지 껍데기들의 난무를 보며, 신동엽이 말한 껍데기의 의미를 알고 있는 우리는, 다시금 새롭게 그의 시를 반추한다. 더불어 그의 시를 다시 음미할 때마다 아득한 절망과 비애를 절감하기도 한다.

나는 오늘도 신동엽의 시를 상기하며, 오늘의 현실 속에서 껍데기들의 난무를 본다. 하지만 모든 껍데기들을 한꺼번에 다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상징 언어이고 함축 언어인 시를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다. 또 그것은 신동엽의 시 작업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오늘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는 수만 가지 껍데기들의 세목을 얘기하기 위해서 이 글을 시작한 것이 아니다. 오늘은 그 무수한 껍데기들 중에서도 한국의 정치판을 더럽히고 있는 '졸장부'들에 관해서 얘기를 하고자 한다.

한국의 정치판을 한없이 좀스럽게 만들고 있는 졸장부 정치인들을 꼽자면 기후 조건과 먹이를 따라 이동하는 철새 정치인들, 그 중에서도 '변절자'들을 맨 먼저 꼽아야 하지만, 주로 한나라당에 많이 몰려 있는 이 변절자들에 대해서는 얼마 전에 한 차례 논급을 했으므로, 오늘은 민주당 쪽의 치사 찬란한 졸장부 정치인들에 대해서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우선 '졸장부'라는 용어에 대해서 정치인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졸장부라는 용어는 내가 그래도 그들을 대접해 주기 위해서 고심 끝에 고른 용어임을 밝힌다. 신동엽의 시를 놓고 보면 껍데기라는 말은 찌꺼기, 쓰레기 등의 단어들을 함축한다. 그러기에 그들에 대해 곧바로 껍데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어떻게 사람인 정치인들을 지칭하는 말로 찌꺼기, 쓰레기 등의 뜻을 함유하는 껍데기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최선책으로 졸장부라는 용어를 채택했는 바, 이 말은 '대장부'라는 말의 반대말이라는 것도 밝혀두겠다. 대장부와 졸장부의 상관성, 또는 대립성이 참으로 분명하고도 엄연하니, 도저히 졸장부라는 용어를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계제에, 내가 지금 계속 '정치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도 정치인들의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졸장부라는 용어와 어울리는 단어로는 '정치인'보다는 '정치배'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우리나라 정치판에 진정한 정치인, 정치인다운 정치인은 별로 없다고 본다. 대부분이 정치배 수준이라고 단정한다. 정치배들이 득시글거리기에 우리나라 정치판이 도무지 품위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요지경 속의 난장판 꼴이 된 것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 모두를 정치인이라고 불러주는 것은, 내 나름의 '희망'을 접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가 정치 모리배의 수준에서 탈피하여 하루빨리 진정한 정치인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더 나아가 졸장부의 면모에서 벗어나서 대장부의 풍모를 지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참으로 간절한 까닭이다.

그런 간절한 바람이 아니더라도, 정치인이라면 대개는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나랏일뿐만 아니라 때로는 세계적인 일까지도 논의하고 결정하는 높은 나리들이신 데, 그들을 어떻게 함부로 정치배라고 지칭할 수 있는가.

또 하나, '대장부'라는 용어 사용에 대하여 여성 정치인들과 모든 여성 독자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아님을 밝힌다. 우리나라 정치판을 아직은 대부분 남성들이 점유하여 좌지우지하는 판국이고, 게다가 대장부의 상대 개념인 졸장부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상황인지라 부득이 이런 봉건 잔재 냄새가 나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니 따뜻이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정치판에 하루빨리 여성 정치인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대장부라는 말을 사랑한다. 사나이 대장부라고 하면 우선 외형적인 풍모가 연상되기 싶지만, 강인한 인상의 헌걸스러운 모습만이 대장부의 기준이거나 필요 조건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또 어깨에 힘을 주는 상황이나 상태만이 대장부의 요소인 것도 아님을 굳게 믿고 있다.

대장부는 우선 소리(小利)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작은 의리 따위에 목을 매지 말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대의(大義)와 정도(正道)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양심과 결부되는 자존심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하고, 부끄러움을 알아야 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결코 대장부가 될 수 없다.

대장부는 상식을 헤아릴 줄 알고 순리를 거스르지 않아야 한다. 아무리 정치판이 변화무쌍하고 음습한 정치공학이 지배한다 하더라도, 대장부는 결코 진실과 정의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으려 하고, 한때 대세나 타의에 떠밀려 잘못 간 길에 대해서는 훗날 통절이 반성하며 국민에게 용서를 빌 줄도 알아야 한다.

이런 것들이 바로 대장부의 자질이나 품성을 구성하고, 대장부의 풍모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것은 공자님이 되기로 작정하지 않은 이상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사회 생활을 포기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일지 모른다. 이런 대장부의 풍모를 추구하다가는 정치판에서 왕따를 당하기가 십상일 것이다.

또 이런 얘기는, 나 같이 비좁은 울타리 안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며 살고 있는 소시민 행색이 오종종한 시각으로 주제넘게 저 광활한 정치 마당을 가로 뛰고 세로 뛰며 사는 덩치 큰 사람들의 세계에 대해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오늘 민주당의 일부 의원들이 보여주고 있는 행태는 너무도 치졸하다. 쩨쩨하고 치사하고 구질구질하니, 그야말로 완전히 졸장부들의 모습이다.

그들은 우선 부끄러움을 모른다. 코미디 같은 짓을 감행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짓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자신에게 강변하고, 찜찜한 구석이 없지는 않지만 내 정치 생명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하니, 결국은 졸장부의 좀스러운 짓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후안무치가 졸장부 정치인들의 생존 원리라는 사실은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항이지만, 길고 긴 민주화 투쟁 시절을 살아왔던 다수 민주당 정치인들에게도 해당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은 내게 깊은 비애를 안겨 준다.

민주당 졸장부 정치인들의 후안무치는 지금 극에 달한 상황이다. 그들은 오랜 민주화 투쟁의 결실인 헌정사상 최초라는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도 수많은 실정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부패 독재 집단으로부터 역공 차원을 지나 온갖 수모를 다 당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진정으로 반성해야 할 집단, 50년 동안 이 나라를 물 말아먹고도 반성 한번 하지 않은 집단으로부터 반성을 충고 받고 강요받는 처지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들은 자기 쇄신과 심기 일전의 기회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그들은 김영삼 '문민정부'의 실패를 거울삼을 수 있는 지혜도 갖지 못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이만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각자의 처지와 위치에서 온갖 고뇌와 힘을 모아왔던 수많은 국민들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했다. 그들의 부패와 실정은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부패와 독재의 오랜 온상 속에서 살아온 청산되어야 할 집단으로부터 오히려 부패정권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씀으로써, 국민들에게 자기분열의 깊은 상처를 안겨 주고 말았다. 50년 관성적 부패 집단이 민주화의 결실로 태어난 정권을 부패정권으로 규정하고 심판 운운하는 현실은, 다시 말해 김대중 '국민정부'의 부패와 실정은 온 국민들에게 자기모멸의 심각한 통증마저 안겨 주고 만 것이다.

그러고도 그들은 국민들에게 죄스러운 마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죄하는 마음과 자기 쇄신이 필요한데도, 알량한 자신의 정치적 이득이나 저울질하며, 어떻게 하면 졸장부 짓을 효과적으로 할까에만 골몰하고 있다.

대선 후보 국민 경선이라는 참으로 의미로운 잔치를 치르고도, 스스로 그것을 부정하고 훼손하는 형태들은 희한하기 짝이 없다. 경선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고 경쟁 상대였던 후보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이 대장부다운 멋있는 모습일 터인데도, 그리고 그것이 후일을 기약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덕'일 텐데도, 온갖 이유를 찾고 갖다 붙이는 짓을 감행하는 이인제의 행위는 졸장부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대선 후보 국민 경선이라는 이름의 큰 잔치에 앞장서서 멋있는 일을 하고서도, 자당 후보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가 일시적으로 하락한 현상을 빌미 삼아 자신의 뜻 있는 역할마저 스스로 부정하는 김영배의 코미디적인 행위는 졸장부 행태의 압권일 수밖에 없다.

대의를 찾기보다는 지역 정서에 기반 하는 작은 의리에 연연하면서 천박한 지역 감정 따위에 자신의 정치 생명을 비끄러매러 드는 송석찬 등 일부 충청권 출신 의원들의 행태 역시 졸장부들의 행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충청도 토박이 주민인 나는, 특히 일부 충청권 출신 졸장부 의원들의 그런 행태들에서 심한 모멸감을 감내하고 있다. 그들이 걸핏하면 충청권 정서 운운하는 언행들에서 뼈아픈 자괴감을 겪는 것이다.

나는 일찍부터 최초 국민 경선의 의의를 훼손하는 민주당 졸장부 의원들이 계속 분란을 일으키지 말고 이제 그만 민주당을 떠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을 거라는 생각을 가져왔었다. '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라는 급조 모임의 '희화성'을 보면서는 저런 저질 정치 코미디를 계속 볼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초조감을 갖기까지 했다. 재벌 정치인 정몽준 의원과 노무현 후보가 몸을 합친다는 것은 말살에 쇠살을 붙이는 격일 수밖에 없는 이치를 그들이 깨닫는 것 역시 감나무 밑에서 감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짓과 다를 바 없기 까닭이었다.

민주당 졸장부 의원들이 한시바삐 당을 떠나기를 바라고 또 예견했던 내 생각은 이제 적중의 시간을 맞고 있다. 바야흐로 정치 철새들의 계절이 도래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청권 출신 국회의원들인 민주당의 전용학과 자민련 이완구의 변신은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는 우리나라의 천박한 정치 풍토―'철새들의 낙원'을 새삼스럽게 실감시켜 준다.

나는 전용학의 민주당 탈당, 이완구의 자민련 탈당, 그리고 한나라당 입당을 보면서 삼십 수년 전에 처음 발표되었던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오늘 다시 읽는다. 가슴을 파고드는 비감에 한숨을 내쉰다. 정치 철새들의 준동을 보며 아직은 '졸장부는 가라'는 정도의 점잖은 표현을 고수하고 싶지만,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는 다시금 내게 새록새록 절절한 감동을 안겨 준다.

아직도 저질 코미디가 판치는 천박한 정치 풍토에, 그리고 정치 철새들이 다시금 준동하기 시작한 이 어지러운 미망의 계절에 환멸을 느끼거나 한 가슴 비감을 끌어안는 사람들이여, 오늘 다시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를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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