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들의 계절> 외 5편의 신작시

등록 2002.10.31 06:47수정 2002.10.3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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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벌써 떠나려 하네


세월 빠름이야
예전에 알았지만
무겁던 세월도
겅중겅중 흘렀는가
품안의 자식이던 딸아이가
어느새 중3이 되었는가 했더니
벌써 둥지를 떠나려 하네
안쓰러워지는 마음에
좀더 보듬어 주려 해도
집념 같은 소망의 날개를
어찌할 수 없네
밤 9시면 학교에 가서
딸아이를 태워오던 세월도
얼마 남지 않았음에
딸아이 없는 저녁 식사 자리가
오늘따라 적이 허전하여
다시금 괜스레
세월만 탓하는 내 가난한 심사….


산을 오르며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를 때마다 다시 느끼는
복되고도 죄스러운
나의 변함없는 일상

단조로움 속에서도
내 몫을 분별하고자 하는
성찰의 지속
지금 이 시각
산을 오르는 자체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육신 건강의 회복을 탐하지 않는다
산 정상 도달만이 목적인 것도 아니다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손에는 항시 묵주가 쥐어져 있으니
오늘도 산을 오르는 일
이 시간이
내게는 더없이 소중하다


오늘도 산을 오른다
산을 오르며 오늘도
내가 살고 있음을 확인한다
'내일'을 위해 살고 있음을….


망둥이를 아시나요?


바닷가에서 사는 덕에
망둥이 낚시 재미에 무한정
넋이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재미가 깨소금인 망둥이 낚시와
결별하고 산 세월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강산이 두 번 변하는 동안 내 가슴엔
망둥이에 대한 이상한 혐오감이
켜켜이 쌓였다

'망각 덩어리 망둥이'
'눈 뜬 장님 망둥이'
'오로지 당장의 먹이밖에 모르는 망둥이'

낚시에 꿰었다가 물로 떨어져
구사일생하고서도
아가리에 줄 끊어진 낚시 바늘을 꿰고서도
금세 다시 낚시를 무는
미련한 망둥이

망둥이 미련한 줄은 알고
웃고 업신여기고 기막혀 하면서도
자신의 망둥이 습성은 까맣게 모르는
대한민국의 냄비, 냄비 대중들

애꿎은 망둥이에 대한
이상한 혐오감과 증오심 때문에
망둥이 낚시조차 길래 외면하는데

또 하루 망둥이 낚시 재미에 홀딱 빠져
다래끼 가득 잡아온 동생의 말
올해는 망둥이 풍년이란다
잡아도 잡아도
조금도 줄지 않는
망둥이 풍년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망둥이 풍년
대한민국의 냄비, 냄비들마다
가득 가득한 망둥이 풍년

아닌 게 아니라 올해는 특별한 해
또 지금은 철새들도 난동하는 계절
올해는 더욱 망둥이 풍년
얼씨구나 좋다!


철새들의 계절

모처럼 만에 천수만을 가보았다
하늘을 뒤덮는 새떼의 비상
대자연의 장관을 보았다
그들은 철새였다
철 따라 이동하는 새떼들의 비상이
하늘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었다

오오, 저 난분분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자연의 질서
무한한 생명력의 몸짓
그것은 완벽한 아름다움이었다

철이 바뀌어도
떠나지 않는 철새들도 있었다
지구 기후의 변화
환경 조건의 난조에
이유를 거는 말도 있었지만
새들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인간 철새들 때문이라고 했다
철새를 흉내내는 인간들이 많고
자연 순리를 따르는 철새들의 이동을
부정적인 의미로 왜곡시킨
인간들의 웃기는 짓거리에
철새들은 그만
이동 의욕을 잃었다나

철새들이 하늘을 뒤덮는 장관 속에서도
천수만 주변에는
계절이 바뀌어도 떠나지 않는
이상한 철새들이 있고
점점 많아진다고 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정치판에서
또다시 인간 철새들이 들끓기 시작한
이 포복절도의 계절에….


청설모에 대한 반감

백화산을 오를 때마다
청설모를 만난다
나를 반기기보다는
매번 약올리는 듯한
청설모 한 마리

본디 생명에 대한 외경심으로
개미 한 마리 밟는 일도 조심하며
산길을 오르는데

처음엔 반가움으로 청설모를 보았지만
차츰 그 놈의 얼굴 모습이
다람쥐처럼 귀엽기보다는
얄밉게만 보이는 것은
외래 동물임을 알았기 때문일까?

편견의 그림자를 느끼면서도
나를 약올리는 듯한
청설모의 얄미운 동작에
한 순간 솟구치는 미운 감정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토종 다람쥐를 물어 죽이는
아메리카 외래종 청설모의
패악스런 모습을 떠올리자
다시 솟구치는 반감

슬며시 돌멩이를 집어드니
청설모는
꼬리를 바짝 추켜세우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 가지로
하늘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며

어디에서 겨울철 잠자리를
해결하고 오는 지 모를
다섯 마리 고양이 가족
아침마다 연립주택 현관으로 몰려와서
유독 우리 집 문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특히 내 기척을 알고
반가운 소리를 낸다
또 하루 아침
고양이들에게 밥을 주며 생각한다
나나 고양이들이나
태어나고 살아감이
자신의 선택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
산다는 것은 곧
치르고 견딘다는 것
치르고 견디는 일의
고통과 슬픔의 무늬들을
고양이들은 알까?
그들의 그것까지는 내가 모르더라도
그들의 배고픔을
포식의 기쁨을
그들에게 부과된 생명의 몫을
나는 안다
나나 그들이나 마찬가지 목숨이니
오늘의 인연 또한
내가 외면할 수 없음도 안다
내가 그들을
그들이 나를
지금 이 자리를
비록 서로 선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저 천지 창조 때부터
오늘은 마련되었으므로….

지금은 분명 철새들의 계절이다. 자연 세계도 그렇고 인간 세계도 그렇다. 자연 철새들의 경우는 그 이동이 엄정한 자연 법칙 속에서 리듬을 갖고 진행되는 것이지만, 인간 철새들의 경우는 자연의 계절과는 관계없이 수시로 돌발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하긴 인간 세상에는 '정치 계절'이라는 것이 있고, 그 정치 계절에는 인간 철새들의 이동이 자심하니, 거기에도 자연 법칙이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계절이 바뀌는 지금은 철새들의 계절이고, 우리는 자연 철새들과 인간 철새들의 비상이 서로 겹치는 광경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시력 정상인 사람들이 보는 바, 인간 철새들의 날갯짓에서는 여러 가지 '속성'들이 노출된다. 우선적으로 '변절'의 혐의가 나타난다. 그 변절에는 졸장부, 소인배, 정치배, 모리배, 협잡꾼 따위의 근성이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것들이 일차적으로 힘을 발휘하여 인간 철새들의 날갯짓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인간 철새들의 준동을 오히려 고마워하는 시각도 인간 세상에는 있는 것 같다. 철새들의 비상이 만들어 내는 대기의 역류 현상도 조금은 있는 것 같고, 해서 인간 철새들의 비상이 인간의 치졸하고 부정적인 속성이나 혐의에 대한 혐오감을, 더 나아가 대다수 사람들의 새롭고도 확실한 '각성'을 유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이 세상에는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무릇 세상 사물의 움직임에는 반동이라는 것이 있지만, 누구도 그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반동이 크건 작건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결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다. 인간 철새들에게는 오늘의 비상만이 중요할 뿐이다. 그 어떤 것도 인간 철새들의 부력을 방해하지 못한다.

인간 세상은 여전히 인간 철새들의 낙원이요, 토양일 뿐이다. 인간 세상에는 오늘도 그것을 확인하고 다지기 위한 일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에 대한 모든 인식과 고뇌들이 참된 희망의 근거 마저 잃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릇 인간의 바른 의지와 참된 희망은, '고뇌의 숲'에서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던가.

아무튼 한국이라는 나라의, 인간 세상의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 철새들은 오늘도 천수만 하늘에서 장관을 이루며 부산하게 이동 연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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