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즐거운 고딩 일기]

등록 2002.12.25 21:11수정 2002.12.28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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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고3으로 접어드는 시기다.


머쓱한 얼굴로 새 학기, 새 학년을 맞았던 그때, 낯설은 이들을 대하기에 부담스러워 평소 말 많다고 자부하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말을 많이 아꼈던 기억도 이제는 까마득하다.

그리고 그때의 내 옆, 앞, 뒤에 앉은 이들을 살피던 그 긴장감 따위도 해소 된지 오래다. 오히려 이제는 그네들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어, 얄궂지만 정다운 별명 따위로 서로를 갈구는 일에 익숙해 있다.

생각해 보면 어떻게 그네들과 이리도 친해 질 수 있었단 말인가.

어찌 보면 우리는 ‘대학’(그것도 안타깝지만 적어도 서울에 있어야 한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이라는 같은 지향점이 있기에,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를 치러내고 서로의 성적을 맞대가며, 왜 성적이 안 오르는지,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에 이미 운명 공동체였던 셈이다.

사실 우리는 평소에, 어떤 대학은 수학을 안보더라 어떤 대학은 고등학교 때 내신을 안 보더라 하는 등의 정보를 나눔에 인색함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일련의 ‘동지애’가 자연스레 친밀감으로 변했으리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렇듯 ‘의식적’으로 운명 공동체였기에 우리가 친해졌다고 보기엔 왠지 지나치게 이해 타산적이다. 그보다 우리는 ‘무의식적’ 운명 공동체에 가까웠기 때문에 1년이라는 시간동안 서로에게 친밀한 존재로 변해 갔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체육시간에 축구를 함께 했다. 우리 학교 교과 과정에는 일주일에 체육시간이 딱 두 시간 있는데, 그 짧은 시간에 함께 뛰는 순간은 너무나 즐겁다. 보통 출석 번호로 홀수, 짝수를 나눠서 뛰는데 우리 반 모두가 27명이니까, 한 팀당 13명꼴이다.(우리 반은 전교에서 유일한 문과 독어반인데, 전교에서 독어를 듣는 비율이 낮아서 다 합해야 27명뿐이다.)


보통보다 많은 수가, 그것도 다른 체육수업을 하는 반과도 맞물려 그 좁지도 넓지도 않은 운동장에서 아옹다옹 하는 공놀이는 즐겁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것은 다름 아닌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그러기를 밥을 다른 이와 같이 먹으면 정이 든다고 했다. 우리는 그것이 한두 끼가 아니었다.(요즈음엔 야간 자율 학습을 해서 저녁마저 같이 먹게 되었다) 그러니 정이 붙을 수밖에.

생각해 보건대 점심시간은 이렇듯, 나와 우리 반 친구들이 알게 모르게 정들 수 있도록 해준 고마운 시간이다.

점심시간 풍경

정확히도, 12시 30분에 종이 울리면(방송부에 있는 친구가 그러길, 요새 수업 종은 컴퓨터로 친다고 한다) 학교 전체가 술렁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밥 먹는 시간이 돌아왔기 때문.

기존 세대들은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싸와서 먹었다고들 하지만, 요즈음엔 세상이 좋아져서 급식이다. 우리학교는 운동장 언저리 즈음에 급식 실을 갖고 있는데, 여름방학때 철판으로 지어진 조립식 건물이다. 그 건물로 전교생이 달려가는 것이다.

급식 실은 얼마 전에 우리 학교에 급식을 공급하는 거래 회사를 바꾸고 나서 바로 지은 건물인데, 여하튼 급식업체를 바꾼 것은 탁월했다고 본다. 기존의 급식은 맛도 없는데다가 어쩌다 맛있는 음식이 나오면 매우 인색하게 굴었다. 학생들의 여론은 들끓었고 결국은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급식은 매우 괜찮다.(굳이 덧붙이고자 한다면 맛있는 반찬을 많이 준다)

점심식사의 메뉴를 보자면, 돈가스와 생선가스의 비율이 다수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는 제육볶음이나 탕수육 순이다.

이렇듯 급식이 맛있어서 인지, 4시간을 학업에 정진하느라 시장기가 많이 느껴져서인지 급식을 단지, 먼저 타기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많은 얌체 같은 녀석들이 새치기를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단지 얄밉게만 여겨지진 않는다. 사회에 나가기 전, 그렇게 노골적인 새치기를 할 수 있는 곳은 학교밖엔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학생들은 암묵적 동의를 한다. ‘너도 하고, 나도 하자’란 식이다. 그렇기에 새치기를 당하는 편에서는 마냥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빈곳을 찾아 그도 잽싸게 나아간다.

이렇듯, 다소 힘들게 급식을 타고 나면 식판위에 밥은 금방 비워진다. 우리 엄마께선 ‘씹지도 않고 그냥 삼키더라.’라는 표현을 쓰시곤 하는데, 그네들과 보조를 맞추긴 위해선 불가피하다. 그렇게 단순히 밥을 먹는 시간은 대개 10분여에 불과하다.

우리 학교의 점심시간은 딱 1시간이다. 그중에서 밥 먹는 시간이 차지하는 비율은 30퍼센트 정도다. 즉 점심시간엔 밥만 먹는 것이 아니다.

나머지 시간을 보내는 축은 대개, 운동장을 조목조목 나누어 ‘콘’으로 골대를 만들고 공놀이를 하는 이들과, 밥을 먹은 후에 밀려오는 노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 이들, 어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온갖 신문에 만연해 있는 연예계의 가십거리를 이야기하는 이들로 나누어진다.

그밖에도, 그 수가 적긴하지만 다가올 3학년의 긴장감을 표출하며 수학 문제집을 들추는 축도 있다.(맨 후자만을 빼고 나는 어느 쪽에나 잘 속한다)

누구든지, 이중 무엇을 택하든지 간에 우리에게 있어 빡빡한 수업일정의 언저리에 있는 점심시간은 정신적인 휴식을 제공해 주는 귀중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사실 그 누가 되었든지 간에 개개인의 점심시간이란 것은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자신과 비슷하기 그지없는 이들과, 밥이 맛있니 맛없니 하는 이야기를 하며 다 먹고 나서는 바로 옷 걱정 없이도 공을 찰 수 있는, 고등학교 생활의 점심시간은 인생에서 한번밖에는 오지 않을 희소성의 가치로 하여금, 나에겐 너무도 특별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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