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에는 수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89> 서울일기<6>

등록 2004.09.02 13:14수정 2004.09.02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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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그 당시 나는 월미도에 가면 송정 앞바다(사진)처럼 시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있는 줄 알았다.

그 당시 나는 월미도에 가면 송정 앞바다(사진)처럼 시푸른 바다와 수평선이 있는 줄 알았다. ⓒ 이종찬

바다가 보고 싶었다. 시푸른 바다 위에 일직선으로 그어진 수평선이 보고 싶었다. 그 수평선을 부리에 물고 끼룩거리며 푸르른 하늘을 천천히 날고 있는 갈매기가 보고 싶었다. 바다 위에 떠도는 하얀 돛단배처럼 푸르른 하늘을 떠돌며 못내 그리운 사람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하얀 뭉게구름이 보고 싶었다.


그날, 나는 영등포구 대림동에 있는 그 자그마한 사출공장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월미도로 향했다. 그 공장에서 가까운 2호선 구로공단역에서 지하철을 탄 나는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가다가 부천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부천역 근처 버스정류소에서 월미도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제 됐다. 그 사출공장은 근로조건이나 임금이 턱없이 나쁘지만 우선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10만 원 남짓한 그 월급으로 한달 방세를 내고 나면 담뱃값 정도 겨우 남을 테지만 한 달 뒤에 직책과 임금을 다시 조정한다고 했다. 그래. 급할수록 둘러가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저어기 손님! 다 왔습니다. 종점입니다."
"여…여기가 월미도입니까?"
"예에. 여기가 월미도 종점입니다."
"저는 월미도라고 하기에 다리를 타고 건너가는 무슨 섬인 줄 알았더니."


섬의 모양이 마치 반달 꼬리처럼 휘어져 있다고 해서 이름 붙은 월미도(月尾島). 그래. 월미도는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외세의 침략근거지로 이용된 뼈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는 곳이 아니던가.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프랑스와 미국 함대가 1875년에는 일본 군함이 닻을 내린 월미도 앞바다.

그날 내가 내린 월미도는 섬이 아닌 육지였다. 1927년부터 1930년 사이에 일제가 매립했다고 했던가. 나는 짭조름한 내음이 나는 월미도에서 내가 꿈꾸는 그런 파아란 바다를 볼 줄 알았다. 근데 아무리 월미도 앞바다를 애타게 둘러보아도 수평선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물빛도 내가 꿈꾸었던 그 시푸른 물빛이 아니라 마치 하수구에 흐르는 구정물처럼 지저분하고 흐릿했다. 이게 바다란 말인가. 나는 월미도 앞바다를 바라보면서 적이 실망했다. 아니,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어릴 적부터 쪽빛 푸른 바다와 점점이 떠 있는 섬 사이로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늘 바라보며 자랐던 내게 월미도 앞바다는 커다란 호수 같았다. 그것도 장마가 진 뒤 벌건 황토물로 출렁이는 그 호수 말이다.


갑갑했다. 갑자기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무언가에 의해서 꽉 막힌 것만 같았다. 늘 흐릿한 구로공단의 하늘처럼 꾀죄죄한 내 마음을 깨끗이 씻어내려 했던 내 생각은 흐릿하고 꽉 막힌 월미도 앞바다를 보는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래. 그래서 서해를 황해라고 부르는 것일까.

월미도 앞바다 옆에는 자그마한 선착장이 하나 있었다. 그 선착장에는 영종도로 가는 배가 있었다. 차라리 저 배를 타고 이곳을 벗어나 좀더 멀리 나가볼까. 아무리 황해라고 하지만 먼 바다까지 나가면 바다 물빛도 푸르고, 내가 오래 바라보고 싶은 그런 수평선도 걸쳐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내 포기했다. 영종도로 가는 배 출항시간이 너무도 애매했다. 그 섬까지 갔다가 돌아오면 너무 늦을 것만 같았다. 그날 나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동동'이라는 말처럼 월미도 앞바다를 이리저리 서성거리다가 목이 너무도 말라 진짜 사이다 한 병을 사 먹었다.

그래. 어쩌면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서울 생활도 달착지근한 사이다를 마시며 바라보는 월미도 앞바다처럼 늘 흐릿하고 꽉 막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월미도 앞바다의 흐릿한 하늘을 천천히 날아다니는 저 갈매기처럼 슬프게 끼룩거리며 고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내야 될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 스스로 선택한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비록 내 앞에 놓인 그 길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게는 문학이라는 등대가 있지 아니한가. 아무리 파도가 거세어도 그 등대가 비춰주는 불빛을 따라 흔들림 없이 인생의 노를 천천히 저어나가다 보면 마침내 항구에 닿을 것을.

그래. 저 흐릿하고 꽉 막힌 것만 같은 월미도 앞바다 속에도 온갖 물고기들이 떼지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언뜻 바라보면 마치 숨을 거둔 것처럼 보이는 저 월미도 앞바다에도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지 아니한가. 저 월미도 앞바다에 허리춤까지 담근 갯바위에도 콩게 서너 마리 동그란 눈알을 굴리고 있지 아니한가.

"소주 한 병 주세요."
"안주는요?"
"라면으로요."
"해산물이 아주 싱싱한데…"
"배가 출출해서요."


그날, 나는 월미도 해변가에 죽 늘어선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를 두어 병 마셨다. 그리고 어둠이 먹물처럼 번져오는 월미도 앞바다를 오래 오래 바라보았다. 혹여 다시 월미도를 찾을 때에는 배를 타고 영종도에 가서 내가 보고 싶은 그 시푸른 바다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가슴에 품고 돌아올 것이라고 스스로 약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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