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세미 한 묶음 들고 식모살이 떠난 그 누이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99>'수세미외'

등록 2004.10.18 14:44수정 2004.10.18 16:1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어린 날 추억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외

어린 날 추억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외 ⓒ 이종찬

언제 나를 따라왔느냐
비음산 아래 탱자나무 가시에 이리저리 찔리며
오래 묵은 기억 한 조각 매다는 너
달무리 만삭으로 지는 밤마다
지주댁 높은 담벼락 타고 기어오르며
누렇게 뜬 얼굴로 바깥 세상 눈도장 찍던 너
그때 너는 지주댁 밥풀떼기 뜯어먹지 않았더냐
그때 너는 애비 모르는 애기를 가졌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애기 지우려 비음산 낭떠러지에서 마구 구르다가
애호박처럼 불러오는 배 질끈 동여매고
비음산 너머 어딘가로 쫓겨났다고 하지 않았더냐
왜 자꾸 나를 부르느냐
아직도 배가 고프더냐
아직도 애비 모르는 그 애기 지우지 못했더냐
아님, 다시 한번 옷 홀라당 벗고
이 세상 묵은 때 온몸으로 닦아내고 싶으냐
밥풀떼기 덕지덕지 묻은 이 세상 설걷이 하고 싶으냐

- 이소리 '수세미외' 모두



나는 지금도 길을 가다가 문득 담벼락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외를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 어딘가가 바늘에 찔린 듯 따끔따끔 쓰려온다. 그 누군가의 오랜 기다림처럼 목을 쭈욱 빼고 늘어진 수세미외, 그리고 그 수세미외 넝쿨에 노랗게 매달린 수세미꽃을 바라보면 이상하게 목이 타면서 배가 슬슬 고파온다.

왜 그럴까. 왜 나는 토실토실 연갈빛으로 익어가는 수세미외를 바라보면서 알찬 가을을 떠올리지 못하고 자꾸만 마음이 슬퍼지는 것일까. 수세미외의 쓰임새 때문일까. 아니면 지주댁 식모살이가 너무 서러워, 달빛 고운 밤마다 애써 발돋움하며 담벼락을 넘보던 그 누이의 앳된 얼굴을 가리던 그 노란 수세미꽃이 떠오르기 때문일까.

a 꽃이 마악 매단 수세미는 언뜻 보면 오이 같다

꽃이 마악 매단 수세미는 언뜻 보면 오이 같다 ⓒ 이종찬

a 어린 수세미는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어린 수세미는 나물로 무쳐 먹기도 한다 ⓒ 이종찬

그 누이가 떠나던 그 해가 1972년이었지. 아마,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으니까. 그해 가을, 나보다 두 살 어린 그 누이는 초등학교 오학 년을 끝으로 학교를 그만뒀지. 그리고 그 누이는 갈라먹기 나락 타작이 거의 끝나갈 무렵 손에 헤진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울며 불며 건너 마을 지주댁으로 식모살이를 떠났지.

그 누이가 떠나던 그날도 그 누이집 싸리담장 위에는 때늦은 수세미꽃이 그 누이의 얼굴에 핀 버짐꽃처럼 촘촘촘 피어나고 있었어. 근데 이상하게도 그 수세미넝쿨 아래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던 수세미참외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어. 아마도 그 누이의 어머니께서 수세미참외를 몽땅 따서 수세미를 만들었던 모양이야. 식모살이 가는 그 누이에게 주느라.

그해 시월, 그렇게 우리 마을을 떠난 그 누이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끔씩 집에 들리곤 했어. 그때 본 누이의 얼굴에는 마른 버짐도 사라지고 제법 뽀오얀 살이 통통하게 올라 참 예뻐 보였지. 그 누이를 식모살이 보낸 뒤 행여나 가슴을 숯더미처럼 까맣게 태우고 있었던 누이의 부모님도 한시름 푹 놓았고….


a 식모살이 떠난 그 누이의 부황 든 얼굴처럼 노랗게 핀 수세미꽃

식모살이 떠난 그 누이의 부황 든 얼굴처럼 노랗게 핀 수세미꽃 ⓒ 이종찬

a 수세미외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내면 자연 수세미가 만들어진다

수세미외를 물에 불려 껍질을 벗기고 씨를 빼내면 자연 수세미가 만들어진다 ⓒ 이종찬

"아, 딸네미(딸)가 살림밑천이라고 하더니…. 인자 저 집은 까딱없다카이."
"그래도 갸(그 아이)가 나이는 쪼매도(작아도) 하도 야무치니까 그 집에서 귀염을 제법 받는 모양이구먼."


그 누이는 한동안 마을사람들의 귀염을 독차지했어. 그도 그럴 것이 툭 하면 쌀가마니가 집으로 부쳐오고, 제법 비싸 보이는 옷가지들까지도 가끔 부쳐오곤 했으니까. 게다가 그 누이는 집에 다녀갈 때마다 부모님에게 제법 큰 돈까지 쥐어주었다고 했지. 또한 그 누이의 부모님은 그 돈을 모아 송아지까지 한 마리 샀고….


근데 그 이듬 해부터 이상하게도 그 누이의 소식을 잘 들을 수가 없었어. 들리는 소문에는 그 누이가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수출자유지역에 취직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또 다른 소문에는 그 누이가 지주댁 아들과 눈이 맞아 돈을 훔쳐 멀리 서울로 도망을 갔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어.

그때 중3이었던 나는 그런 말을 눈꼽만큼도 믿지 않았어. 중학교 졸업장도 없는 그 누이가 중학교 졸업장이 필요한 수출자유지역에 취직을 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 게다가 그렇게 마음씨 착하고 나이 어린 누이가 지주댁 아들을 좋아했다거나 지주댁 돈을 훔쳐 도망갔다는 그런 얘기를 나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고.

a 수세미씨를 빻아 먹으면 복수가 차거나 헛배가 부른 데 그만이다

수세미씨를 빻아 먹으면 복수가 차거나 헛배가 부른 데 그만이다 ⓒ 이종찬

a 우리는 수세미외를 그냥 수세미라고 불렀다

우리는 수세미외를 그냥 수세미라고 불렀다 ⓒ 이종찬

"니, 그 소문 들었나? 내 참 기가 맥혀서 이 말은 죽어도 안 할라꼬 캤는데…."
"머슨(무슨) 말인데 그리 호들갑을 떠노?"
"쉬이~ 갸 안 있나? 갸가 식모살이만 한 기 아이라 지주댁 후처살이까지 하다가 지주댁 마누라한테 들키가(들켜가지고) 고마 쫓겨났다 카더라."
"씰데없는 소리? 갸가 시방(지금) 나이가 몇 인데 그런 얄궂은 소문이 다 나노."
"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거 봤나?"


우리 마을에 그 흉흉한 소문이 들리면서부터 나 또한 그 누이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어. 설이나 추석이 되어도 그 누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이 사실은 뒤에 알게 되었지만 그 누이는 지주댁에서 식모살이를 하던 도중 애비 없는 애기를 가졌었대. 누구의 짓인지는 잘 몰라도….

그때 그 누이는 자꾸만 불러오는 아랫배 때문에 산에 올라가 낭떠러지에서 몇 번이나 굴렀다고 했어. 하지만 애기는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 때문에 지주댁에서 반쯤 죽을 정도로 매를 맞은 뒤 어디론가 쫓겨나고 말았대. 그때 정신이 반쯤 나갔다던가. 하여튼 그 뒤부터 그 누구도 그 누이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지.

그 누이의 소식이 끊긴 그해 가을에도 그 누이의 싸리담장 위에는 그 누이의 부황 든 얼굴처럼 노오란 수세미꽃이 수없이 피어났어. 그리고 그 누이가 식모살이 가던 그해보다 더 많은 수세미외가 주렁주렁 매달렸지. 그때 나는 틈만 나면 그 누이의 싸리담장에 매달린 수세미외를 오래 바라보곤 했어. 마치 그 누이의 얼굴을 보는 것처럼.

a 나는 지금도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를 바라보면 그 누이가 생각난다

나는 지금도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를 바라보면 그 누이가 생각난다 ⓒ 이종찬

a 기형으로 자란 이 수세미처럼 내 어린 날의 추억도 기형이 많다

기형으로 자란 이 수세미처럼 내 어린 날의 추억도 기형이 많다 ⓒ 이종찬

"니, 퍼뜩 가서 수세미 좀 따온나."
"와예?"
"수세미도 만들고 수세미 씨로 빻아가(빻아가지고) 약도 좀 맨들구로(만들게)."
"수세미 물도 좀 받아오까예?"
"수세미 물은 필요없다. 그거로 자꾸 얼굴에 발라쌓으모 멀쩡한 가심(가슴)에 바람끼 든다 카이. 그 가시나 그거 맨치로."


그 당시 우리 마을사람들은 집집마다 장독대 옆에 수세미외를 심었어. 그리고 수세미외가 싸리담장 위로 넝쿨을 쭉쭉 뻗으며 노오란 수세미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마을 누님들은 그 수세미 넝쿨을 자른 뒤 수세미물을 그릇에 받아 얼굴에 자주 바르곤 했어. 수세미물을 바르면 얼굴이 양귀비처럼 예뻐진다고 하면서.

그때 젖먹이를 둔 마을 어머니들은 누님들이 화장수를 받는다며 잘라놓은 그 수세미넝쿨을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었어. 그리고 아이들 젖을 먹이기 전에 그 시꺼먼 가루를 따뜻한 물과 함께 약처럼 먹곤 했어. 게다가 열이 나거나 기침이 심한 사람에게도 그 가루를 만병통치약처럼 자주 먹이곤 했지.

"수세미 이거는 버릴 기 하나도 없는 기라. 넝쿨로 태워가 가루로 내서 묵으모 열병(장티푸스)에도 그만이제, 동상 걸린 데도 늙은 수세미로 돼지기름에 개어가 바르모 끝내준다 아이가."
"오데 그뿐이가? 씨로 빻아가 묵으모 헛배 부른 기나 복수 찬 것도 금방 가라앉제, 씨로 빼로 난 거는 수세미로 쓰모(사용하면) 그릇이 울매나 잘 닦이노."


a 올 가을에는 자연산 수세미를 써 보세요

올 가을에는 자연산 수세미를 써 보세요 ⓒ 이종찬

수세미 속이 하늘을 잇는 실처럼 얽혀 있다고 해서 천락사(天絡絲) 혹은 하늘 그물 같다고 해서 천라(天羅)라고도 부르는 수세미외. 우리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만병통치약쯤으로 귀하게 여기며 장독대 옆에 심었던 수세미외. 식모살이 떠난 그 누이의 야무진 꿈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그 수세미외.

나는 지금도 담벼락에 주렁주렁 매달린 수세미외를 바라보면 마른 버짐 핀 그 누이의 얼굴이 어른거린다. 지주댁에 식모살이를 갔다가 애비도 모르는 애기를 가진 죄로 쥐도 새도 모르게 비음산 너머 어딘가로 쫓겨났다는 그 누이. 가끔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수세미꽃처럼 노란 눈웃음 툭툭 던지던 그 누이가 못 견디게 그립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3. 3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4. 4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5. 5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