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사금파리 부여잡고 88

남한산성 - 핏빛 돼지

등록 2005.06.09 17:02수정 2005.06.09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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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으리!"

홍명구의 옆에 있던 사령이 홍명구의 몸에 박혀있는 화살을 뒤늦게 서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홍명구는 침착하게 손을 올려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은 후 호랑이 가죽이 깔린 의자에 걸터앉아 품에서 평안감사의 부인(符印)을 끌러내 사령에게 주었다.


"부인이 내 몸을 떠났으니 난 여기서 죽어 마땅하다. 넌 살아 나가서 이 싸움을 조정에 전하라."

홍명구는 자리에 앉은 채 다시 활을 들어 다가오는 오랑캐를 향해 쏘았다. 사령이 울먹이며 망설이자 홍명구는 호통을 쳤다.

"내 이놈! 군령을 어길 셈이냐!"

사령은 연실 눈물을 흘리면서도 홍명구의 명을 따라 포위망을 뚫고 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홍명구는 칼을 뽑아들고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창을 들고 달려오는 청의 병사를 두 동강으로 베어버렸다.

"감사 나으리!"


멀리서 이 광경을 보게 된 윤계남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주변에 흩어져서 청병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던 병사들도 홍명구를 구하기 위해 달려왔다. 홍명구는 입에 피를 머금은 채 칼을 휘둘렀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 지 잠시 후에는 함부로 덤벼드는 청나라 병사가 없을 정도였다. 그 틈을 헤집고 윤계남과 병사들은 홍명구를 둘러싸고 엄호했다.

"이보게 계남이! 난 이미 틀렸네…."


홍명구는 잠시나마 적병이 눈에 들어오지 않자, 손에서 칼을 떨어트리고 주저앉아 버렸다. 윤계남은 그런 홍명구를 부축하며 눈물을 흘렸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으리는 꼭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명을 내리겠네… 병사들과 함께 살아남을 방도를 찾게나."
"나으리!"

홍명구는 순간 마지막 힘을 짜내어 윤계남을 밀친 후 땅에 떨어진 칼을 주어들고 청병들이 창을 곧추 세우고 밀집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윤계남은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보았느냐! 적을 하나라도 무찌르고 죽어라!"

윤계남은 칼을 부여잡고 병사들에게 쉰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쪽에서는 장판수가 밀려오는 청병을 맞아 악전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덤비라우! 어서 덤비라우!"

천 여 명을 헤아리던 조선군은 곧 오백여명으로 줄어들었고 다시 이백여명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청군의 만, 몽, 한 연합병은 아직도 팔천여명이 건재했다. 조선군의 저항에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은 지라 마부대는 한 곳에 몰아넣은 조선군에게 더 이상 다가서지 말고 활로서 집중 사격을 가할 것을 명령했다. 방패는커녕 몸을 숨길 곳도 없는 개활지에서 조선군은 하나둘씩 화살을 맞고 쓰러져 갔다. 장판수와 윤계남은 등을 맞댄 채 손을 마주잡았다.

"이보라우! 이젠 헤어질 때가 온 거 같네!"

장판수는 핏발 선 눈으로 윤계남에게 소리쳤다. 윤계남 역시 피범벅이 된 손에 힘을 주며 외쳤다.

"저승에서 만나세!"

마지막으로 남은 조선군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지르며 청군의 진지로 돌격했다. 윤계남이 청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졌으나 장판수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청군의 행렬과 맞닥트린 장판수는 이가 빠진 칼로 청군을 베며 사납게 날뛰다가 더 이상 칼날이 먹히지 않자 이를 버리고 맨주먹으로 청의 지휘관을 향해 몸을 날려 엉겨 붙으려 했다. 그 순간 거센 충격과 함께 장판수의 눈에 비친 모든 것이 새까맣게 변하고 말았다. 처절한 전투가 드디어 끝난 산등성이와 골짜기에는 청군과 조선군의 시체가 마구잡이로 엉긴 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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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소설 '고주몽', '홍경래의 난' '처용'을 내 놓은 작가로서 현재도 꾸준한 집필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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