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구, 지는 스님이 아닌디유?"

머리를 시원하게 잘랐습니다

등록 2005.06.15 20:35수정 2005.06.16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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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눈을 뜨면 곧장 밭으로 달려갑니다. 괭이질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 용감무쌍하게 땡볕에서도 밭을 갈고 있습니다. 얼굴을 반쯤 뒤덮은 턱수염조차 거추장스럽습니다. 바리캉으로 긴 턱수염을 밀고 있는데 아내가 말합니다.


"어이그, 인효 아빠 이마는 왜 그렇게 좁아, 당신 식구들 중에 제일 좁은 거 같어, 깎는 김에 이마 위에 잔털도 밀지?"
"그런다고 좁은 이마가 넓어지남?"

"그래도 쪼금만 넓히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그려, 밭도 넓혔는디, 이마라고 넓히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

우리 어머니와는 달리 아내가 볼 때 내 이마는 좁습니다. 사실 내가 볼 때도 좁습니다. 아내는 종종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좁은 이마에 시비를 겁니다. 이전에는 아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했는데 이번에는 아내 소원대로 이마에 바리캉을 댔습니다.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좁은 이마 선을 침범해 들어오는 잔털만 살그머니 밀어낸다는 것이 그만 쓰윽 밀어버리고만 것이었습니다. 쥐새끼가 고구마 갉아먹은 것처럼 앞머리가 움푹 파였습니다. 내친김에 머리 한복판에 고속도로를 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지방도로도 내고 샛길도 냈습니다.

"인저, 당신이 좀 깎아 줘, 시원허게!"


이발소 아저씨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나는 머리 손질에 땡전 한 푼 투자 하지 않습니다. 더위가 시작될 무렵, 1년에 한 차례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적게 벌어먹고 사는데 머리도 한 몫을 하는 셈이지요.

우리 집 아이들과 나는 아내의 손을 빌려 머리를 깎고 있습니다. 아내가 미용기술이라도 있냐고요? 한 달에 한 번쯤 손질하는 아이들 머리는 고도의 손놀림이 필요하지만 내 머리를 깎는 데는 미용기술이 전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바리캉으로 싹 밀어버리면 그만입니다.


"헤, 아빠, 스님 같다."

우리 집 아이들이 스님이라고 놀려댑니다. 이전에는 보통 밤송이머리로 깎곤 했는데 이번에는 완전 스님 머리로 박박 밀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제는 밭일을 하다가 갑사 내원암의 진짜 스님, 석호스님의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충주에 갔습니다. 석호스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같이 공부하는...' 도반으로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은 석호스님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공손히 합장을 합니다. 그냥 인사치례의 합장이 아니었습니다. 박박 머리에 너덜너덜한 검정고무신을 신고, 흙 범벅이 된 반바지에 색 바랜 흰 티셔츠 차림, 영락없이 밭 메다 말고 나온 털털한 스님 모습이었습니다.

"아이구, 지는 스님이 아닌디유?"

황송해 하며 손사래를 쳐도 소용없었습니다. '에이, 스님도 참, 농담도 잘 하시네' 라는 표정으로 헤어질 때 역시 다들 합장을 했습니다.

"허참, 진짜루 스님이 아니라니께유."

장난 끼 많은 석호스님은 한술 더 뜹니다.

"차 안에 승복이 한 벌 더 있는데, 빌려 드릴까요?"

집 밖으로 나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어쩌다 우리 집 아이들 몰래 담배를 피우게 되는데 뭇 시선들이 곱지 않습니다.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이고 있는데 늙은 보살님과 시선이 마주쳤습니다. '스님이 내 놓고 담배를 다 피우고...'라는 곱지 않은 시선이었습니다. 입가에서 담배를 떼는 순간, 한 생각이 스쳤습니다.

'나는 스님도 아닌디….'

내가 만약 석호스님과 함께 동행 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나를 행려병자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이번처럼 비슷한 차림으로 치과에 갔다가 치과의사에게 행려병자 취급을 당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때로는 내가 깍두기 군단 머리로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기라도 하면 나를 조직폭력배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솔직히 행려병자나 조폭 취급을 당하는 것보다는 스님 대접을 받는 것이 기분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스님 대접을 받은 것 역시 개운치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본래의 나에게 예를 갖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스님 머리'에 예를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대부분 사람들은 생면부지의 스님, 목사님, 신부님, 모든 성직자들의 진면목에 예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우선 겉모습에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성직자의 진면목인 '세상에 빛'이 되지 않고 되려, '성직자의 옷'을 걸치고 뭇 중생들로부터 꼬박꼬박 공밥을 챙겨 먹어가며 욕망의 사슬을 끊지 못한다면 조폭이나 행려병자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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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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