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힘내세요"

붉은 철 대문에 새겨진 조악한 글귀의 힘

등록 2005.07.05 18:31수정 2005.07.0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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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해안 녹도 섬마을 어느 집 대문에 새겨진 글귀

서해안 녹도 섬마을 어느 집 대문에 새겨진 글귀 ⓒ 송성영

“청와대 힘내세요.”


갈팡질팡하고 있는 청와대에게 쓴 소리나 '청와대는 자폭하라'는 식의 짱돌질은 못할망정 뜬금없이 뭔 놈의 헛소리냐고요? 네티즌들에게 뭇매 맞아 죽고 싶어 환장했냐고요?

붉은 양철 대문에 너절하게 적어 놓은 글귀, 페인트칠에 가까운 이 조악한 글자는 충남 대천항에서 1시간 거리, 서해바다 뱃길 따라 70리에 위치한 녹도 섬마을 어느 집 붉은 철대문에 새겨진 글귀입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은 지난 봄, 다큐멘터리 제작팀과 함께 한 가족, 세자매가 전교생인 그곳 녹도 분교를 취재하러 갔다가 찍은 것입니다. 녹도에는 60여 가구 170여명이 살고 있는데 그 중 누군가 적어 놓은 것입니다.

집안으로 복이 왕창 들어오라는 입춘 관련 글귀도 아니고, 여백미도 전혀 없이 대문 가득 청와대 힘내라니, 청와대에게 무조건 충성해 줄 것을 강요했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절도 아닌데 도대체 누가 적어 놓았을까?

붉은 철대문 앞은 바닷물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페인트칠은 해풍에 오래 견뎌내지 못합니다. 글자가 적힌 붉은 철대문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페인트칠은 멀쩡했습니다. 불과 일이년 사이에 적어 놓은 듯싶었습니다.


군부독재정권 시절이었다면 '반공방첩'과도 다름없는 끔직한 글귀로 다가와 고개를 돌렸을 것이었는데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붉은 철대문 안을 끼웃거려가며 수차례 두들겨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이라고 합니다.

그 의문은 집에 돌아와서 풀렸습니다. 디지털 카메라를 컴퓨터에 연결해 사진들을 옮겨 놓다가 문득 '청와대 힘내세요' 글귀 아래 '3月'을 발견했습니다. 현장에서 무심코 보아 넘겼던 3월은 분명 지난 해 3월을 뜻하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누군가 속 터지는 심정을 옮겨 놓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 글귀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대통령 탄핵을 반대했던 모든 사람들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과연 그런 심정으로 청와대를 바라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대문을 도배하고 싶을 만큼 청와대를 응원하고 싶은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흰 페인트로 조악하게 쓴 청와대의 '와'자를 자세히 보면 본래 '화'로 썼다가 '와'로 고친 흔적이 보입니다. 녹도의 붉은 대문집 주인 입장에서는 '청화대'건 '청와대'건 상관없었을 것입니다. 대통령이 사는 곳, 나라 일을 이끌어가는 곳일 따름이었을 것입니다.

붉은 철대문집 주인은 그 글귀에 썩을 대로 썩어 문드러진 정치판에 당당히 맞서 싸워 나라를 똑바로 이끌어 가 달라는 염원을 담았을 것이었습니다. 붉은 철대문은 다른 집 대문 보다 초라해 보입니다. 그 집 주인은 버젓한 대문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보입니다. 가진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청와대를 응원한 것은 당장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복잡한 정치구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부정부패로 앞날이 캄캄한 대한민국의 올바른 길잡이가 되어주길 바랬을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는 녹도 마을 앞 등대처럼 말입니다.

a 녹도 섬마을 앞 등대

녹도 섬마을 앞 등대 ⓒ 송성영


'청와대 힘내세요'는 어찌 보면 응원가처럼 다가옵니다. 본래 청와대가 힘이 세다면 힘내라는 말은 하질 않았을 것입니다. 총칼로 밀어붙였던 독재정권시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지금의 청와대는 힘이 없습니다. 힘이 없다 보니 이제 이 당 저 당과 연정을 하려고 합니다. 아니 본래 청와대는 힘이 있었습니다. '청와대 힘내세요'라고 응원해 주는 국민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는 그 힘을 믿지 않고 있는 듯합니다. 국민의 힘을 믿지 않고 썩어 빠진 정치인들의 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녹도의 붉은 철대문에 새겨진 '청와대 힘내세요'는 아직 페인트칠조차 변하지 않았습니다. 1년 넘게 모진 해풍을 끄떡 없이 견뎌 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청와대는 변했습니다. 탄핵 정국을 돌파했던 그 당당한 청와대가 아닙니다. 페인트칠이 다 떨어져 나가 판독하기 어려울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녹도의 '청와대 힘내세요'는 분명 탄핵정국을 이겨냈던 힘이었습니다. 썩어 빠진 정치판을 바꿔 놓겠다는 힘이었습니다. 정정당당한 대한민국을 원하는 대다수 국민들의 힘이었습니다.

청와대는 그 힘으로 일어섰습니다. 정치인보다는 그 힘에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썩어빠진 정치세력보다는 다 낡은 붉은 철대문의 조악한 글귀에 담겨진 힘이 더 세다는 것을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청와대 힘내세요'라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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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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