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산 선생님 영전에 무릎 꿇고 사죄드립니다"

안흥 산골에서 띄우는 편지 (124)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 열리다

등록 2005.07.08 22:17수정 2005.07.10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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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총회장에 참석한 내빈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총회장에 참석한 내빈들이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 박도

애국애족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야

광복 60돌을 한 달 남짓 앞둔 2005년 7월 8일 오전 11시, 경북 구미시청 4층 대강당에서는 매우 뜻 깊은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열렸다. 허위 선생이 순국한 지 97년만의 일이요, 왕산 유족이 일제 등살에 고향에서 살 수 없어서 야반도주하다시피 만주로 망명한 지(1915년) 90년만의 일이다.

이날 행사는 구미문화원(원장 김교승) 주관으로 열린 바, 유족으로 왕산 장손 허경성 부부, 증손 허윤 부부, 후손 허벽, 허호 씨를 비롯하여 외손 권화조, 권영조, 이항증, 허씨 대종회 허장열 간사장, 일가친척과 이의근 경상북도 도지사, 김관용 구미시장을 비롯한 김덕 전 안기부장, 류영하 안동유림 대표, 윤영길 구미시의회의장 등 150여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a 이의근 경북지사

이의근 경북지사 ⓒ 박도

이 날 행사에는 왕산 선생 막내아들의 막내아들 허블라디슬라브(54)씨가 멀리 키르키즈스탄에서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는 만주에서 일제탄압으로 러시아로 갔다가 거기서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떠나 살았던 순국 애국지사의 후손으로 가시밭길 인생을 산, 산 증인이다(2005. 6.22~6. 23에 EBS에서 방영된 <왕산가 사람들> 참고).

이 날 창립총회는 국민의례에 이어 왕산 장손 허경성씨가 생가부지 600여 평(시가 6억원 상당)을 구미시(시장 김관용)에 기증하는 전달식이 있었다. 이어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 추진 경과보고에 이어 경북지사의 축사가 있었다.

a 왕산 맏손부 이창숙 여사(73)와 4촌 시동생 허블라디슬라브(54) 만남, 이번 귀국이 첫 만남이라고 한다.

왕산 맏손부 이창숙 여사(73)와 4촌 시동생 허블라디슬라브(54) 만남, 이번 귀국이 첫 만남이라고 한다. ⓒ 박도


이 지사는 "국난을 당하여 13도 창의군 군사장으로 장렬히 순국하신 왕산 허위 선생의 기념사업은 때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훌륭히 기념공원과 기념관을 건립하여 애국애족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와 정신이 함께 발전하는 고장을 만들겠다

a 왕산 장손 허경성(오른쪽) 선생이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생가 터 기부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왕산 장손 허경성(오른쪽) 선생이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생가 터 기부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 박도

이어 김관용 구미시장은 "왕산 선생님 영전에 무릎 꿇고 사죄를 드립니다"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뒤, 앞으로는 경제와 정신이 함께 발전하는 내 고장 구미를 만들겠다면서 왕산을 통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 과업에 힘쓸 것이며, 다시 한번 왕산 선생과 세계 각지를 떠돌고 있는 유족에게 경의드리며 용서를 구했다.

이어 김교승 구미문화원장의 사회로 임원 선출(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 노진환 선출, 21세기 경북발전협의회위원장)이 있었고, 신임 추진위원장이 나와서 정관 승인과 의결 등으로 폐회되었다.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회의 주요 사업 내용은 ▲왕산 생가 터에 기념공원조성
▲왕산 기념관 건립 ▲청소년교육을 위한 학습프로그램 개발 ▲왕산 전기 및 전집 발간 ▲기타 문화 사업 등으로 왕산 순국 100주년이 되는 2008년까지 연차적으로 펼쳐갈 예정이라고 한다.

6년 전, 고향이 아닌 중국 만주에서 왕산을 알고서 귀국 후 왕산 생가 터의 황폐함을 줄기차게 지적 보도하였던 기자로서 감화가 크다. 기자의 <오마이뉴스> 첫 기사가 '왕산 생가 황폐화' 기사였다.
a 애국가를 부르는 유족들(왼쪽부터 허블라디슬라브, 허호, 허경성 허벽 선생)

애국가를 부르는 유족들(왼쪽부터 허블라디슬라브, 허호, 허경성 허벽 선생) ⓒ 박도


왕산 허위 선생은 누구인가

(아래는 구미 금오산 도립공원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문'으로 필자가 다소 첨삭하였다. 필자 주)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5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동에서 태어나신 분이다. 1896년 왜적은 날로 모진 이빨을 드러내 우리의 주권을 앗아가니 선생은 책을 덮고 선비의 매운 서슬을 떨쳤다.

그해 3월에 격문을 사방에 날려 의병을 일으키고 김천을 거쳐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의 깃발이 충청도 진천 땅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해산하라는 고종 황제의 왕명을 받들게 되어 눈물을 머금고 군사를 흩었다.

1899년 평리원 재판장 의정부 참찬 등의 관직을 지내며 도도한 탁류 속의 한 가닥 맑은 샘으로 넘어져 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밝고 넓은 경륜을 펼쳤다. 그러나 기둥 하나로 쓰러져가는 나라를 받치기에는 너무 기울어졌다.

왜적의 침략은 한층 심해지고 반역의 무리들이 더욱 날뛰니 다시 격문을 펴 그들을 꾸짖다가 왜병에게 잡히어 넉 달의 옥고를 치른 뒤 벼슬을 내던지니 1905년이다.

그 후 선생은 경상, 충청, 전라, 세 땅이 맞닿는 삼도봉 아래 숨어서 각도의 지사들과 연락하며 새로운 무장 투쟁의 길을 찾았다.

1907년 나라의 심장부인 경기에서 두 번째 깃발을 들어 양주, 포천, 강화 등지를 달리며 적과 맞서 싸웠고, 온 나라에 흩어져 있는 의병들을 묶어 연합 진용을 만들고 선생은 그 군사장이 되었다. 적 침략의 거점인 통감부를 무찌르고 수도를 탈환하여 왜적의 세력을 이 땅에서 몰아내는 작전으로 서울을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나 다른 의병들이 약속한 시간에 닿지 못하자 선생이 몸소 300여명의 결사대만 거느리고 동대문 밖(현 망우리)까지 쳐들어가 고군분투하다가 패퇴하였으니 나라의 아픔이요, 역사의 슬픔이다.

1908년 경기도 연천군 유동에서 왜병에게 잡히니 하늘은 정녕 이 나라를 버렸다는 말인가!

그해 10월 21일 54세를 일기로 서대문 옥에서 기어이 가시고 말았다. 선생은 겨레의 선각자요, 선비의 본보기며 광복 투쟁의 등불이요, 민족정기의 수호자다.

그 높은 뜻 금오산에 솟구치고
그 장한 길 낙동강에 굽이쳐
길이길이 이 땅에 푸르리라.

덧붙이는 글 | EBS 창사특집방송 <왕산가 사람들> 1, 2부(2005. 6. 22~23 방송) 인터넷으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EBS 창사특집방송 <왕산가 사람들> 1, 2부(2005. 6. 22~23 방송) 인터넷으로 다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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