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내'가 나는 세계 다룰 뿐, 내 시에 관념은 없다"

[인터뷰] 산문집 <빛은 사방에 있다> 낸 시인 김정란 교수

등록 2005.10.16 11:34수정 2005.10.2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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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김정란 상지대 교수

김정란 상지대 교수 ⓒ 오마이뉴스 남소연

철저하게 남성 중심으로 꾸려진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길이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이 길을 만들어낸다'며 지식인들에게 입을 열어 말하라고 외치는 여성 논객이 있으니, 그는 김정란(52) 교수다.

지난해 말 인터넷신문 <데일리서프라이즈>에 기고했다가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극우기독인에게 고함-예수도 국가보안법 희생자'란 칼럼을 쓴 이가 바로 그다.


그런 김정란 교수가 최근 몇 년 사이 대사회적 발언들을 담아냈던 여러 산문집과는 다른 느낌의 산문집 <빛은 사방에 있다>(한얼미디어 펴냄)를 냈다.

'시와 일상의 풍경'이란 그의 산문집 부제가 무척 낯설게 와닿는다. 김 교수는 그동안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안티조선 운동을 비롯한 대사회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뭇매를 맞아가며 문학권력을 비판한 '투사'로서의 면모가 깊게 각인돼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김정란의 본령은 문학, 그 중에서도 시다. 백상출판문화상 번역 부문상과 소월시문학상 수상자라는 이력은 그가 '유려하고도 섬세한 문장'력을 소유한 시인이라는 점을 객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런 그이기에 '시와 삶에 대한 사유의 기록'을 담아 이번에 내놓은 산문집은 오랜만에 길을 나선 친정나들이인 셈이다.

정치와 사회적 얘기를 최소화한다는 단서를 달아 지난달 말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김정란 교수를 만났다.


"낯설다는 평가는 받아들여도 '관념적'이라는 평가에는 동의 못한다"

"앞서 냈던 산문집들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산문집을 내고 싶었습니다. 이를 테면 감각적 인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책. 세계의 가장자리에 위태하게 떠있는 '말의 섬' 같은 책. 지성과 직관과 감각을 부드러운 빛 안에서 통합하는 책. 그런 책을 내고 싶었습니다."


김정란 교수는 천상 시인이었다. 책과 문학에 대해 얘기하는 그의 입에서 사회를 향한 날선 발언이 나올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김정란 교수의 몸과 마음은 여리디 여려 보였다.

김정란의 글은 그의 구분대로라면 시와 평론 같은 '미적인 글쓰기'와 대사회적 발언이 주류를 이루는 '실용적 글쓰기'로 나뉜다.

그런데 그의 글을 보면 존재의 시원(始原)을 탐구하는 형이상학적인 문학과 직설적 비판을 서슴지 않는 시사칼럼의 간극은 도저히 한 사람의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 편차를 보인다.

"그동안 해왔던 사회적 발언은 내 자신의 본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회적 요구에 침묵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조선일보> 문제는 문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문제라고 파악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언어를 왜곡시키는 집단이니까요. 문인에게 언어는 존재 이유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장난하는 조선일보와 싸우는 것은 지극히 문학적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사회적 발언이 내면깊은 곳에서 발원하는 '존재의 탐구'에 대한 열망과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시인과 논객으로써의 글쓰기는 존재의 각기 다른 요구에 대답하는 형식일 뿐, 분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의 생각에 따르면 두 가지 글의 형식이 다른 것은 그것이 삶의 다른 층위에 관여하는 만큼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시나 평론에 주어지는 '어렵다'거나 '관념적이다'는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제 시가 '낯설다'라는 평가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시에 늘 주어지는 '관념적이다'라는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관념이 삶의 구체적인 덕목과 관련이 없는 것, 사변적인 것이란 의미에서 쓰이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제 시는 현대인이 잊어버렸거나 잘 의식하지 못하는 근원적 세계 안에서 여성의 육체와 인식을 통해 모두 생생하게 체험되고 인지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관념 이전의 세계를 다룹니다. 매우 '날내' 나는 세계이지요. 제 시에 관념은 없습니다."


현대사회는 시가 필요한 시대... 시인은 '말하는 자의 진실성' 담고 있어야

김정란 교수는 현대사회는 어느 때보다 시가 필요한 시대라고 말한다. 현대사회가 제공하는 문화로는 만족할 수 없는 불행한 개인들이 깊이있는 것을 찾기 때문이란다.

"사람들은 지쳐가고 있습니다. 영상문화의 현란함과 대중성은 많은 사람들을 만족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직접성과 빠른 속도, 성찰성의 부재, 인문적 깊이의 결여, 반지성적 특성 등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과 우주와 교통하는 인간의 깊은 영성에 갈망을 느끼며, 그런 갈망은 다시 깊이를 요구하고, 그 깊이에 대한 요구는 결국 시를 요구하게 된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세상살이의 감각적 측면을 장식해주는 예쁘고 감성적 시가 아니라 영혼 탐색의 결과물인 시, 기도이며 사유인 시, 근대 정신사가 버렸던 인간적 자질인 영성 회복으로서의 시가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주제 안에서 김 교수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시로 통합된다. '내가 시를 어떻게 찾아갔던가, 시가 어떻게 나를 찾아왔던가'에서 후자라고 말하는 김 교수는 시도 기도라고 말한다. 언어의 길을 따라 신성함에 이르려는 간절한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 시란다.

그래서 '시인'은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말하는 자의 진실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존재 내면에 몰두하는 형이상학적 시를 쓰는 그가 사회적 정치적 발언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진실한 말에 대한 희망' 때문이었다.

"'다름'을 '그름'으로 보는 게 문제"

a 김정란 상지대 교수

김정란 상지대 교수 ⓒ 오마이뉴스 남소연

"다른 견해를 '다르다'가 아니라 '그르다'고 보는 게 문제입니다. 상대방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고 대화상대가 아니라 '비난' 상대로 깎아내립니다. 1970, 80년대 폭력이 언어행위 안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상대방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하고 딱지를 붙이고,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존재성을 폄하하는 데서 더 나아가 아예 지워버리는 폭력이 언어행위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죠."

그동안 많은 비난에 시달린 탓인지 김정란 교수는 사회적 문제에 대해 말할 때는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가급적 정치, 사회 얘기는 하지 말자고 조건을 다는 그는 지금 혼자였다.

비교적 그와 잘 소통하고 있는 노혜경 시인이 최근 청와대 비서관직을 그만두고 노사모 대표에 나간다(10일 노사모 대표일꾼으로 선출됨)는 점에 대해서도 그는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다.

"최근에 나온 노혜경의 시집 <캣츠아이>를 보더라도, 그는 한국 문학이 전혀 가지지 못했던 빼어난 상상력을 가진 시인인데, 원해서라기보다 어쩔 수 없는 지형 때문에 나서야 하는 것이 가엾습니다."

그가 말하는 '정리되지 않은 지형'은 합리적인 게임 룰이 정착되지 않은 상황을 말한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누구든 합리적인 게임 룰의 틀 안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마음껏 펼쳐 보이며 자신의 소신에 따른 정책 결정을 위해 경쟁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

정정당당한 정책 경쟁이 아니라 인신공격이 난무하고 지역을 기반으로 대중을 선동하며 합리적 의사소통 구조가 정착되는 것을 방해하는 행위가 정상적 정치행위로 이해되는 그런 상황이 문제라는 것이다.

"상대방의 말을 맥락에서 떼어내 말끝만 물고 늘어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여론을 조작하는 것이 요즘 거대언론들이 주로 하는 일이지요. 참 답답하고 슬픈 일입니다. 공동체 전체가 이들의 잘못된 언어행위로 병들어 가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보수층은 최소한의 합리성마저 결여하고 있는 문제적 집단이고, 엄정해야 할 언론이 이들에게 철저하게 복무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 사회는 늘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래서 김 교수는 이들의 비합리성을 합리성으로 견인해 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며 그는 그러나 보다 나은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 삶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꾸어 왔다고 했다.

"세상을 조금씩이나마 바꾸어온 그런 사람들의 존재가 매우 소중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빨갱이 취급을 하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눈앞의 이익에만 집착하지 말고, 제발 상황을 좀 더 멀리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사유를 키운 열쇠말은 '영혼' '우주' '시간' '글' '말' '사랑' '여성'

자신의 사유를 키워준 열쇠말로 '영혼' '우주' '시간' '글' '말' '사랑' '여성'같은 낱말을 꼽는 김정란 교수. 그는 어린 시절 늘 혼자였던 게 시인으로 키워준 것 같다고 했다. 특히 그는 꿈을 많이 꾼다. 그의 꿈 해몽이 그럴 듯하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선 꽤 유명하다.

그런 그는 요즘도 꿈을 많이 꾼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가르침이나 예언이 아니라 '인식 패러다임'에 관한 꿈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꿈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그는 여성은 복수형이라고 말한다. 생물학적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들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잘난 사람보다 못난 사람에 더 관심을 갖고 같이 살려고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 난해하다고 여겨지는 이유로 자신이 상징적 글쓰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1980년 이대 이후 은유조차 읽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상징적 글쓰기는 더더욱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 같다고 한다.

"사실 저는 은유를 즐겨 쓰지 않습니다. 그건 일종의 자리바꿈 같은 형식이거든요. 은유는 세련된 언어적 속임수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단순한 직유를 씁니다. 그건 속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상징은 다릅니다. 상징은 존재의 아주 깊은 심층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되거든요. 물론, 그것 역시 제도의 억압을 받습니다. 그러나 언어를 사용하는 자가 심층의 깊은 지역까지 파내려갈 수 있다면, 그 억압의 정도는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그는 상징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상징을 읽기 위해 필요한 방법은 특별한 것은 없고 많이 읽고 생각하고 자신의 내면의 능력을 발견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고 했다. 상징은 깊은 내면에서 스스로 분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특히 가을을 잘 탄다. 육체적인 힘이 모자라는 인간인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사유하기 적합한 때여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가을은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을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터뷰를 끝내고 거리에 나선 그의 발길은 이미 저만치 가을 속으로 깊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김정란은 누구인가

영락교회를 일으킨 열 장로 중 한 분을 아버지로, 전도사를 어머니로 두고 태어난 김정란은 어려서부터 기독교와 함께 자랐다.

지금은 작고한 김춘수 시인으로부터 데뷔 당시에 "너는 이미 시인"이란 평을 받았다. 불문과를 나와 방송사 아나운서와 여행사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에 유학, 그르노블3대학에서 '이브 본느프와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때가 그에게는 무척 힘든 시절이었다. 귀국하여 지하셋방에 살던 시절에 남편 친구 황지우 시인이 "쌍(雙) 박사 잘 사시오, 나무뿌리보다 낮은 곳에 살 때 좋은 시 많이 쓰십시오" 라고 말한 적도 있었단다.

윤석화가 1인 주연을 하기도 했던 <목소리>라는 연극의 최초 주연을 맡기도 했던 그는 1976년 <현대문학>을 통해 문단의 말석에 명함을 디밀었다.

소심하고 비겁했기에 80년대에 움직이지 못했다고 스스로 반성하는 그는 문단권력을 비판하여 소위 문학논쟁의 시발점을 제공했고, 안티조선일보 운동, 독재자의 딸 박근혜 논쟁, 예수 논쟁 등의 한쪽 당사자가 되어 자신이 발언해야 할 공간을 찾아 분명한 입장을 취해 왔다.

그는 자신이 지금 몸담고 있는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에 깊은 애정과 노력을 쏟고 있다. 인터뷰하면서 책 얘기보다 문화콘텐츠학과에 대해서 더 많이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

최근에는 켈트 신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출판사 사정으로 출간이 중단되었던 장 마르칼의 <아더왕 이야기>(전8권)를 연말 정도에 펴낼 예정이라고도 했다.

그의 책에는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 <매혹, 혹은 겹침> <그 여자 입구에서 가만히 뒤돌아보네> <스·타·카·토 내영혼> <용연향>, 문학평론집 <비어있는 중심> <영혼의 역사> <연두색 글쓰기> <말의 귀환> <분노의 역류> 등이 있다.

빛은 사방에 있다 - 시와 일상의 풍경

김정란 지음,
한얼미디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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