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한나라당의 인계철선?

[김태경의 동북아브리핑] 눈치 없는 한국의 보수진영

등록 2006.08.21 12:26수정 2006.08.21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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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14일 오후 국회 당 대표실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와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가 14일 오후 국회 당 대표실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인계철선(trip wire)이란 말이 있다. 지뢰나 조명탄 등에 연결되어 몰래 침입해오는 적군이 건드리면 터지도록 유도하는 철선을 말한다. 이는 주한미군의 역할과 관련해 많이 사용된다. 즉 휴전선 바로 밑에 주둔중인 주한미군은 북한군이 남침할 경우 반드시 부닥칠 수밖에 없어 전쟁에 자동 개입하게 되므로 인계철선 역할을 한다는 논리다.

오는 2008년까지 주한미군이 한강 이남인 오산과 평택으로 이전함으로써 인계철선 역할은 끝난다. 그런데 요즘 국내 정치권에 또 다른 인계철선이 등장한 것 같다.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을 이양해도 한·미 동맹은 아무 문제가 없다, 이 문제가 정치화돼선 안 된다"고 미국 정부는 강조하는데 한나라당을 비롯한 국내 보수진영은 기어코 미국을 끌어들여 '국제적 정치화'를 시도하고 있으니 말이다. 꼭 조지 부시 행정부의 발목에 인계철선을 연결하는 것 같다.

8월 초부터 전작권 문제가 한국 정치권의 치열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보수진영은 미국이 원하지도 않는데 한국 정부가 전작권을 돌려받으려 하고 있으며, 이는 '좌파' 노무현 정권이 북한 김정일 정권에 대한민국을 갖다 바치는 행위인 양 비판했다.

미국과 '엇박자' 낸 보수진영

부시 행정부는 이런 한국 내 논쟁에 대해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노무현 정부 들어 미국의 요구에 의해 이뤄진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인정 등은 결국 전작권 반환의 선행 수순이었다. 그러나 보수진영에서 자꾸 미국이 반대하는 양 목소리를 높이자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가 지난 14일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버시바우 대사는 "전작권 단독행사 문제가 이슈로서 제기될 수 있지만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면서 "안전한 이양이 되어야 하며, 위험을 최소화하는 로드맵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신중하게 되어야 하고 정치화 돼선 안 된다"고 말해 정치화에 열심이던 한나라당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는 한나라당이 목마르게 원했을 말인 "전작권 반환은 한·미동맹에 위협"이라는 식의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지난 14일 한나라당 주최 토론회에서 남성욱 고려대 교수는 "전작권 문제엔 '주권'이나 '자주'의 컨셉트가 포함돼 있어 오래 끌수록 한나라당에 불리하다"며 "노무현 대통령이 선점한 이슈에 한나라당이 끌려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만든 '자주'란 덫에 한나라당이 걸려들었다"고 덧붙였다. 이후 한나라당은 초조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중앙일보>는 지난 18일 '전작권은 대박상품'이란 1면 머릿기사를 통해 "노무현(사진) 대통령의 지지율은 10%대에 불과하지만 전작권 환수에 대한 지지율은 50%대"라며 "노 대통령이 전작권에 자주·주권 컨셉트를 끼워 팔면서 한나라당이 공세에서 수세 국면으로 몰리게 됐다고 선거 전략가들은 해석한다"고 보도했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미선·효순양 사건이 '자주' 논란으로 번졌고 "미국에 할 말은 하겠다"고 선언했던 당시 노무현 후보의 당선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이제야 상기한 모양이다.

여기서 전작권 논란을 둘러싼 정치적 해석은 뒤로 하자. 우선 기억할 것은 이 문제를 먼저 정치화시켰던 쪽은 노무현 정부가 아니라 보수진영이었다는 점이다. 전작권 환수문제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한미간에 간헐적으로 논의되었다. 가깝게는 지난 6월 9일에도 노무현 대통령이 "5년 남짓한 세월 안에 전시작전통제권을 스스로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뒷북친 보수... 난감한 미국

이때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던 한나라당과 보수 언론들은 지난 8월 2일 전직 국방장관 15명이 이 문제를 제기하고 현 정부를 공격하자 갑자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리고 대 정부 공세의 유력한 수단으로 미국을 끌어들였다.

전작권 문제를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던 미 행정부로서는 난감한 지경이 됐다. 냉전이 해체된 1990년대 이후 세계 각국에 민주화된 정권이 들어서고 시민사회가 성장하면서, 미국은 해외 주둔중인 미군이 해당 국가의 시민사회와 대립하거나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는 것을 대단히 꺼려한다.

전작권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미국이 '눈치도 없는' 국내 보수진영에 인계철선으로 붙잡혀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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