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10월, 11월 날씨가 서늘해지면 벌레의 활동은 둔해지고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후루노 다카오/홍순명 옮김-백성백작》(그물코,2006) 173쪽
“벌레의 활동(活動)은”은 “벌레 움직임은”이나 “벌레들은 움직임이”로 다듬습니다.
┌ 둔하다(鈍-)
│ (1) 깨우침이 늦고 재주가 무디다
│ - 머리가 둔하다 / 어리석고 둔한 사람
│ (2) 동작이 느리고 굼뜨다
│ - 걸음걸이도 느리고 행동도 둔하다 / 차량들의 움직임이 둔하다
│ (3) 감각이나 느낌이 예리하지 못하다
│ - 그녀는 둔해서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 신경이 둔하고 무식해서
│ (4) 생김새나 모습이 무겁고 투박하다
│ - 날씨가 추워서 옷을 껴입었더니 몸이 둔하다 / 무겁고 둔해 보이는 몸집
│ (5) 기구나 날붙이 따위가 육중하고 무디다
│ - 피해자의 머리에는 둔한 흉기로 얻어맞은 듯한 상처가 보였다
│ (6) 소리가 무겁고 무디다
│ - 멀리서 둔하게 들리는 대포 소리
│ (7) 빛이 산뜻하지 않고 컴컴하다
│ - 창틀에는 둔하게 빛이 나는 무슨 기계가 하나씩 놓였는데
│
├ 벌레의 활동은 둔해지고
│→ 벌레는 뜸해지고
│→ 벌레는 줄어들고
│→ 벌레는 사그라들고
│→ 벌레는 잦아들고
└ …
곡식을 갉아먹는 벌레이지만, 날이 서늘해지면 조금씩 줄다가 어느새 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는 ‘둔하다’를 썼는데, 이 말보다는 ‘줄다-잦아들다’ 같은 말이 한결 어울리지 싶어요.
┌ 머리가 둔하다 → 늦되다, 어리석다, 모자라다
├ 움직임이 둔하다 → 느리다, 굼뜨다
└ 신경이 둔하다 → 무디다
국어사전을 보면 모두 일곱 가지 ‘둔하다’가 보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도 이 말 ‘둔하다’를 퍽 오랫동안 입에 달고 살았지 싶습니다. 그래서 일곱 가지 쓰임새를 하나씩 놓고 입에 굴려 봅니다. 어릴 적부터 ‘둔하다’라는 말만 썼는지, 다른 말도 함께 썼는지 곱씹어 봅니다.
┌ 둔해 보이는 몸집 → 투박하다, 무겁다
├ 둔한 흉기로 얻어맞은 → 묵직하다
├ 둔하게 들리는 소리 → 무겁다
└ 둔하게 빛이 나는 → 칙칙하다
낱말풀이 (1)∼(3)은 어느 만큼 썼어요. 그렇지만 (4)∼(7)은 쓴 일이 없습니다. 다른 분들 입에서도 (4)∼(7)은 거의 들을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 또한, (1)∼(3)에서도 저마다 다른 모습을 알맞게 맞추어 썼구나 싶어요. 덜 떨어지거나 잘 모르는 사람을 가리켜 “머리가 둔하다”고도 했지만 “머리가 어리석다”라든지 “머리가 모자라다”고 했습니다. 잰 몸놀림을 보여주지 못하고 늘 어기적어기적하는 모습을 두고 “움직임이 둔하다”고도 했지만 “움직임이 느리다”거나 “움직임이 꿈뜨다”고도 했어요. “그것도 못 느낄 만큼 둔하냐”고도 했으나 “그것도 못 느낄 만큼 무디냐”고도 했어요.
가만히 보면, 때와 곳에 따라 다 다르게 쓰던 우리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이처럼 다 다르게 쓰던 우리 말이 사라지고 있으며,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에는 쓰임새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할 만큼 되었습니다. ‘어리석다-모자라다-느리다-굼뜨다-무디다-투박하다-묵직하다-칙칙하다’ 같은 말을 어디에서 얼마나 들을 수 있을까요. 교과서에 이런 낱말이 쓰이나요. 동화책이나 소설책에 이런 말이 쓰이나요. 시나 수필에 이런 말이 쓰이나요. 방송에서 새소식을 알리는 분들이, 신문에 기사를 쓰는 분들이 이런 말을 쓰나요.
우리가 제때 제대로 못 느끼는 사이에 사그라드는 우리 말이구나 싶어요. 우리 스스로 쓰임새를 줄이고 쓰이는 자리를 없애며 쓸모를 내버리고 있는 우리 말이지 싶어요. 우리 스스로 안 가꾸는 우리 말이며, 우리 스스로 사랑하거나 아낄 마음을 안 쏟는 우리 말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8.10.22 14:40 | ⓒ 2008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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