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에게도 열리지 않는 문

[역사소설 수양대군13] 조선 최고의 상품을 손에 넣으려는 수작

등록 2011.09.02 10:00수정 2011.10.07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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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구련성  압록강변 중국 단둥 구련성 표지

구련성 압록강변 중국 단둥 구련성 표지 ⓒ 이정근


구련성에서 하룻밤을 묵은 사신 일행은 대열을 정비하고 북경을 향하여 출발했다. 맨 앞에 깃발을 든 전배(前排)가 앞장서고 정사(正使) 수양이 탄 말을 견마잡이가 이끌었다. 그 뒤로 부사 이사철, 서장관 신숙주, 역관 5명이 탄 말이 뒤따랐다. 식량자루와 이부자리를 등에 메달은 말고삐는 마두가 잡았고 노복들은 걸었다.

책문에 도착했다. 국경검문소다. 잘하면 부드럽게 지나고 일이 꼬이면 시간이 지체되는 관문이다. 중국은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광활한 땅을 황무지로 버려두고 있었다. 통나무를 세우고 갈대로 엮어놓은 모습이 조선의 수수깡 울타리와 흡사했다. 사자관이 수석 역관을 대동하고 말에서 내려 초소로 향했다.


고압적인 자세에 설설 기는 조선 관리들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조선 사신입니다."

예를 갖춘 나직한 목소리다. 망루에서 사신 일행을 살피던 군사가 문을 빼꼼히 열고 내다보았다.

"누구라고 했느냐?"

경력 12년차 역관이 유창한 북경어를 구사했지만 짐짓 못 알아듣는 척이다.


"사은 사입니다."
"이 사람이 난청증이 있나, 말귀를 못 알아듣나, 누구라고 묻지 않았느냐?"

직위는 별로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고압적인 자세다.


"조선국 임금의 숙부 수양대군이십니다."
"수양인지 수말인지 우리는 그런 거 모른다."

빼꼼하게 열려있던 문마저 닫혀 버렸다. 완전 문전박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수양은 치욕을 느꼈다. 지금까지 수양의 앞길을 막는 자는 없었다. 수양이 가고자 하는 길은 갈 수 있었고 열고자 하는 문은 열렸다. 하지만 자신에게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그 주체가 중국일 수 있다는 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무례를 서슴치 않는 국경검문소 군사들, 속셈은 딴 곳에 있었다

국경검문소 군사들의 무례와 횡포는 외교 결례라고 예부에서 병부에 협조를 요청했으나 병부의 지휘를 받는 국경 검문소 군사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황제나 된 것처럼 행동하고 거드름을 피웠다. 특히 책문 군사들은 황제를 알현하러가는 조선 사신을 얕잡아 보고 멸시했다.

"어서 문을 열어주시오."

목소리가 더욱 공손해졌다.

"밀무역이 극성을 부려 짐 검사를 철저히 하라는 영(令)이 내렸다. 너희들의 짐이 너무 많으니 일일이 검사해야겠다."

날카로운 음성이 문밖으로 튀어나왔다. 전수검사 해야겠다는 것이다. 밀수(密輸)에 구실을 두었으나 골탕을 먹이겠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작심 냄새가 물씬했다. 이런 일을 예견하고 의주에서 떠날 때 서장관이 물목을 면밀히 점검했으나 책문에서 책잡힐 물건은 없었다. 하지만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면 초라해지는 것은 조선 사신단이고 지체되는 것은 시간이었다.

명나라 군사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짐 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사신 일행이 먹을 식량과 육포가 쏟아져 나왔다. 잘 말린 북어와 건어물이 펼쳐졌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의 옷가지와 이부자리가 햇빛아래 민낯을 드러냈다. 민망했다.

'아휴, 열받는다,' 승질대로 하자니 사고칠것 같고...

사신 일행의 짐 호송을 책임 맡은 만상 군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을 걷어 부치고 주먹을 날릴 기세다. 하지만 여기는 중국 땅이다. 여차하면 입국이 금지될 수도 있고 가야할 길이 먼 사신 일행의 여정에도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

"항상 이렇게 까다롭게 구는가?"

잠자코 지켜보던 수양이 신숙주에게 물었다. 신숙주는 열세 번이나 드나들었던 관문이다.

"오늘따라 유난스럽습니다."

명나라의 조선 사신 기(氣)죽이기에 걸려든 것이다. 책문 군사들은 별 볼일 없는 사신이 지나가면 조금 귀찮게 하고 보내주었지만 조선국 임금 이상 급, 즉 왕의 형이나 동생, 장인이 지나가면 유난히 까다롭게 굴었다. 그래야 떨어지는 부스러기가 많기 때문이었다.

조선 최고의 상품을 손에 넣으려는 수작

"삼 몇 뿌리 내려주어라."

신숙주가 명했다. 삼(蔘)은 중국에서 고가에 거래되는 약재다. 특히 사신들이 진상품으로 가지고 가는 개성 인삼은 삼중에서도 질이 좋은 특급 인삼이다. 때문에 밀수의 대상이기도 했다. 검색이 심한 의주 통로를 피해 만포에서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스며들었고 벽란도에서 배에 실려 등주로 밀송(密送)되었다. 명나라 조정은 삼 때문에 은 반출이 심해지자 삼(蔘) 밀수자들을 사형이라는 엄한 벌로 다스렸다.

인삼이 명나라 군사들의 손에 들려졌다. 기세등등하던 명나라 군사들의 콧대가 서리 맞은 뱀처럼 수그러들었다. 사신 짐 보따리를 열심히 뒤지던 책문 군사들의 입이 귀에 걸렸다. 까다롭게 굴었더니 소득이 괞찮다는 표정이다. 세종시대. 이러한 속성을 알고 있던 세종의 장인 심온은 명나라 사신 길에 아예 인삼을 한 수레 싣고 와 책문 군사들의 입을 찢어지게 한 일이 있었다.
#수양대군 #신숙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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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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