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으로 새 삶 사는 우리 엄마

예전보다 발랄해진 엄마의 모습 떠올랐습니다

등록 2000.08.25 18:32수정 2007.06.18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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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경기북부를 강타했던 만큼의 호우가 남부지방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조금 그치는가 싶으면 우다다아~ 우산이 뚫릴 만큼 맹렬한 비가 쏟아집니다.


아침 출근길에 눈에 띄는 보행자 한 명을 발견했습니다. 살이 비뚤어진 우산을 들고 유난히 뒤뚱거리는 모양새로 걷고 있었습니다. 걸을 때마다 얼마나 뒤뚱거리는지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만한 걸음걸이였습니다. 머리가 짧아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그 노인은 중풍 후유증으로 오른쪽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환자였습니다.

중풍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사망확률이 높은 병으로 50대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의 중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병입니다. 작년 한해에 미국에선 약 칠십만명 이상의 중풍 환자가 발생했고, 이 중에 약 1/3이 중풍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이는 매 일분마다 중풍이 하나씩 생기고 매 삼분마다 중풍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람이 한 명씩 생긴다는 말입니다.

오빠가 세른넷이라는 나이로 마침내 역사적인 '총각딱지'를 뗐던 96년 봄. 결혼식 한달만에 엄마가 쓰러지셨습니다. 당시 서울에 있던 저 막내딸은 밤새 차를 타고 병원 중환자실에 갔습니다. 벌개진 얼굴로 산소마스크를 쓴 채 엄마가 누워계셨습니다. 말도 못하고 눈도 못뜨고 호흡기때문에 반쯤 벌린 입이 전부였습니다. 식구들이 침대 주위로 모였다는 걸 아셨는지 말도 못하고 눈도 못뜨는데 눈물은 흘리셨습니다.

바로 옆에선 해골처럼 마른 중년아저씨와 간병하는 아들 모습이 초췌했고, 그 옆 침대에선 황달병으로 눈동자까지 노래진 남자와 아내가 우릴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은근히 침묵하고 있는 중환자실, 엄마도 처음이었고 저희 식구들도 처음이었습니다.

4개월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계셨습니다. 자식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병원침대를 같이 했습니다. 걸음마부터... 천천히... 모든 인생을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색깔, 숫자, 말 하나 하나 다시 배우고 연습해야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한걸음씩 내딛는 엄마를 보며 그동안 몰랐던 '자존심'이란 걸 볼 수 있었습니다.


몇 번 안되는 명절마다 친척들의 위문도 부쩍 많아졌습니다. '얼마나 놀랬느냐'며 내거는 말에 엄만 자유로이 대꾸하지도 못합니다. 친척들이 가고 나면 온식구가 눈물바다였죠. 신체의 절반이 축 늘어진 모습을 보인 것, 못내 창피하고 자존심 상한 일이었나 봅니다.

아무 소리없이 눈물 흘리고, 그나마 성한 왼손으로 눈물을 닦는 엄마가 안쓰러웠습니다. 오른쪽 볼에 흐르는 눈물을 잘 닦지도 못하는 엄마가 가슴 아팠습니다.

동네에서 소문난 김치솜씨, 입술 하나를 그리는데 족히 삼사십분은 걸렸던 까다로운 미학, 노래를 좋아하시던 낭만 그리고 여자로서의 콧대. 엄마는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피부가 시들듯 엄마의 표정도 많이 시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딱 한가지 새롭게 얻은 것은 있다는 거죠. 평소 엄마는 자식들에게 무뚝뚝하신 편이었습니다. 표현도 애교스럽지 못했고요. '우리 딸 최고야'란 소리 한번 헤프게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중풍으로 쓰러진 5년이 지난 지금에는 달라지셨습니다. 보고 싶은 딸에겐 보고 싶다고 하고 식구들 앞에선 더 많이 웃으십니다. 목욕을 시켜드리면 잘 안움직이는 팔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자세를 잡아줍니다. 모처럼 밀려나오는 큼직한 때때문에 짜증을 부려도 '좀 세게 밀어봐'라고 응수하십니다.

이제 쉰 일곱되신 엄마는 장애2급 판정을 받은 상태로, 국내 항공 50%를 할인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졌습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본 그 노인은 엄마처럼 손질하기 쉬운 커트머리에 유난히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출근길 차가 막혀있는 대로변을 열심히 걷고 있었습니다.

몸은 비록 시들해졌지만 더 발랄하게 살아가는 엄마가 떠올랐습니다.
엄마! 항상 씩씩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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