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특성에 맞는 '초기업' 교섭체제를 만들자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 20] 산별교섭운동의 전망과 과제

등록 2012.10.30 12:01수정 2012.10.3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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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조·공공운수노조·금융노조·보건의료노조 등이 참여하고 있는 '산별노조연석회의'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는 '2012 노동 있는 민주주의와 노사관계개혁을 위한 연속기고 - 왜 다시 산별노조인가?' 연중 캠페인을 진행합니다. 2012년 권력교체기, 한국 사회에서 노동 있는 민주주의 담론 확산과 산별노조운동 진전을 위한 실질적인 공론의 장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말]
우리나라 노사관계 환경에서 산별교섭이 어렵다는 것은 여러 차례 제기돼왔다. 그럼에도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산별교섭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계속 내고 있다. 이쯤에서 왜 산별교섭을 하려고 했는가를 다시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왜 그동안 산별교섭이 잘 안 됐는지도 분석해봐야 한다. 길이 막힌 곳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왜 그 길을 가는지, 우회로를 찾아볼 수는 없는지를 다시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단 얘기다.

먼저 왜 산별교섭을 추진했는지부터 정리해 보자. 산별교섭은 기업별 교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시작됐다. 기업별노조-기업별교섭 체제는 기업단위로 임금과 근로조건이 결정되는 구조다. 기업단위 노사관계 체제는 초기업적 단결을 어렵게 한다. 기업단위 임금·근로조건을 뛰어넘어 거시적인 노동정책에 대한 개입력도 약할 수밖에 없다.

또한 기업단위 교섭은 너무 많은 교섭비용을 필요로 한다. 노동운동진영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산업별 단일조직을 건설하고, 산업별 교섭을 통해 전국적인 조직력과 정책역량을 집중해 사회개혁적 개입을 강화하는 노조운동을 지향해온 것이다.

지난 10년간 산별교섭은 노조운동의 주요 역점사업 중 하나였다. 그 결과 금속·보건·금융 등 일부에서 형식적으로는 산별교섭이 추진됐다. 그러나 내용이 빈약했다. 기업별교섭의 한계로 지적된 기업별 임금·근로조건 결정으로 인한 기업 간 노사관계 분절화 현상은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초기업단위 사회개혁적 정책의제들도 산별교섭으로 해결한 것이 많지 않다. 노조는 산별교섭을 요구하고, 사용자는 기업별교섭을 고집하면서 노사갈등은 많아졌고, 교섭비용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해부터 복수노조가 시행되면서 산별교섭은 더 어려워지는 추세다.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의 구조적 특징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산별교섭이 난관에 봉착했다고 판단된다면 그 원인을 냉정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거기서부터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산별교섭의 진행 과정을 보면 몇 가지 장애요인을 확인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대두되는 장애물은 우리나라의 기업별교섭 관행이다. 우리나라는 1953년 노동조합법 제정 이후부터 기업별노조와 기업별교섭, 기업별 단체협약이 제도화돼왔다.


유럽식 길드적 전통에 기반한 직종별교섭의 전통이 아니라 기업별교섭 관행이 자리 잡았다. 이러한 기업별 단체교섭제도의 특성은 우리나라의 노동시장 구조도 직종별 외부 노동시장이 아니라 기업단위 임금·근로조건 결정이 중요한 구조적 특성을 낳았다. 이러한 기업별교섭과 기업별 임금·근로조건 결정구조는 기업별 귀속의식과 기업별 노사관계 문화 등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로 구조화돼왔던 것이다.

기업별노조-기업별교섭 체제는 '87년 체제'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1987년 노조의 폭발적인 성장기에도 기업별노조가 대거 설립됐고, 기업별 단체교섭이 양적으로 늘어났을 뿐 질적인 전환은 없었다.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의 토대 위에서 산별교섭을 추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과제였다.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에서 형성돼 온 기업별 임금·근로조건 격차, 기업별 의식과 문화는 초기업단위 교섭 자체를 어렵게 하는 강력한 환경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했다.


제일 먼저 노조운동 내부에서 산별교섭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았다. 특히 대기업 노조들은 산별교섭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기업별교섭 체제에서 대기업노조의 조직력으로 쟁취한 임금과 근로조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경향이 나타났고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또 다른 장애요인은 사용자 측의 산별교섭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였다. 사용자 측은 산별교섭이 노조운동진영의 투쟁적 조합주의를 더 강화시킬 것을 우려했다. 또한 이중교섭으로 인한 높은 교섭비용 문제도 부담이었다. 결국 산별교섭은 노동운동진영의 요구로 쟁취하는 방식으로 추진됐고, 그 결과 형식은 갖췄지만 실제 산별교섭으로서의 내용은 취약한 교섭구조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교섭이익 공통성' 만드는 산별교섭 추진해야

산별교섭 추진 과정을 돌이켜보면 실현가능한 초기업단위 교섭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우회로를 찾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첫째는 산별교섭이 노사 양측의 '교섭이익 공통성'을 만드는 방식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산별교섭이 노조의 일방적인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용자측도 동의할 수 있는 교섭방식이 될 수 있도록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섭이익의 공통성은 일차적으로 교섭비용을 줄일 수 있는 교섭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중교섭의 문제점에 대한 해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중교섭이 진행되는 한 사용자측은 교섭비용의 증가와 교섭의 불확실성 증가 등의 이유로 산별교섭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둘째는 교섭단위의 범위를 교섭이익의 공통성을 만들 수 있도록 설정할 필요가 있다. 산별교섭 단위가 너무 넓으면 노사 간 임금·근로조건 등 중요한 교섭쟁점을 놓고 실질적인 교섭을 하기 어렵다. 현재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조 간 산별교섭이 잘 안 되는데, 교섭이익의 공통성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같은 산업 내에서 유사한 근로조건과 노조활동을 중심으로 소산별 단위로 묶어 초기업단위 교섭을 추진하는 방안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에 병원업종에서 특성별로 교섭단위를 묶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 나가고 있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초기업단위 교섭에서 단체협약의 기능과 정책협의 기능을 분화시켜나갈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산별교섭은 단체협약 기능과 정책협의 기능이 혼재돼 있었다. 단체교섭 요구안에 정책협의 관련 쟁점이 포함돼 있다 보니 정책 관련 쟁점들을 단체협약에 포함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노사 간 힘겨루기가 이뤄지곤 했다.

초기업단위 교섭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능적 혼선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단체교섭에서는 임금·근로조건 등 노사가 책임을 지고 이행할 수 있는 사항을 중심으로 다루고, 정책적으로 해결할 쟁점은 업종별 노사정 정책협의 기능을 활성화해 다루는 방식으로 기능적 분화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넷째, 초기업단위 교섭의 집중도를 높이고, 조정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교섭의 집중도를 높이면서 조정기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노사 양측의 이익의 공통성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기업단위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산별노조나 사용자단체의 리더십을 확립해야 한다. 특히 조정기능이 제대로 작동되려면 상급단체의 리더십이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사용자 측의 리더십과 조정기능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한국형 산별교섭 모델을 만들어가자

마지막으로 산별교섭을 추진하는 데 있어 우리나라의 노사관계 환경에 맞는 초기업단위 교섭방법을 찾아 나가는 접근방식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산별교섭은 유럽의 산별교섭 제도에서 많은 영감과 방법론적인 해법을 찾아왔다. 그러나 유럽은 길드조합에서부터 출발한 직종별노조-직종별교섭 제도가 관행으로 정착되면서 발전한 산별교섭 제도다.

강남의 귤이 강북에 가면 탱자가 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환경과 조건이 다르면 같은 씨앗도 다른 결실을 얻게 됨을 말하는 것이다. 유럽 산별노조의 좋은 결과도 유럽의 노사관계 역사와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는 기업별 노사관계 체제가 구조화돼 있다. 우리나라의 특성에 맞는 초기업단위 교섭체제를 정착시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현실을 보고, 우리의 해법을 찾아나가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 이 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산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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