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검증의 함정

- 한국/한국여성의 현실

등록 2000.03.02 11:07수정 2000.03.0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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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성 정치인의 가족사가 이슈가 되고 있다는 기사를 쓰기 전부터 그리고 쓰고 나서도 기자는 내내 괴로워했다.
'내가 꼭 이런 기사를 써야 하나?'

고민의 출발은 기사의 주인공이 된 그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당의 공천을 받은 직후부터 숱한 입매질의 대상이 되어 왔다. 물론 정치판에서 경쟁자들끼리의 이전투구야 늘 있어온 일이지만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성이 받는 공격은 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가지고 있다.

이번 논란의 핵심에도 변함없이 '세상에 여자가'라는 식의 수식어가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짧은 말 한마디에 한국의 자화상과 한국 여성의 현실이 그대로 농축되어 있다.

공인이기 때문에 사생활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논리에 섬뜩함마저 느껴진다.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도덕적 순결성이 요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검증하겠다는 발상은 너무 오만하지 않은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보호받아야 할 사생활이 있다.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필요한 이유는 인간의 존엄과 인격이 형성되는 가장 기초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투명한 사회는 인간의 사생활이 전면적으로 폭로되고 노출되었을 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가치가 투명하고 그 가치가 사회적으로 공유되고 소통될 때 우리는 그 사회를 투명하고 깨끗한 사회라고 부른다.

자신의 사생활은 철저하게 보호받기 원하면서 공인이라 지칭되는 타자에겐 그 절대적 잣대를 슬쩍 거두는 이중성이 한국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대상이 여성이었을 때는 이중성의 잣대가 가공할만한 폭력으로 외화되어진다는 점이다.

만약 김경천 씨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이런 말도 나옴직하다.
"남자가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지!"
남성에겐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여성에겐 천륜을 저버린 대역죄가 되는 것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무조건 추앙받을 이유도 없지만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한번 더 삐딱하게 의심받을 이유도 없다. 게임의 룰에도 맞지 않다. 공평한 출발이야말로 게임의 기본적 룰이 아니었던가.

김경천 씨가 이번 파문으로 당선이 되든 안되든 그건 당사자와 지역 유권자의 문제다. 그러나 승패를 결정짓는 본 게임에 앞서 감춰진 얘기가 인구에 회자되고, 그것을 키득거리며 즐기는 수많은 '깡패들'에게 그는 치유할 수 없는 폭행을 당한 것이다.


기자가 기사를 써놓고 비애를 느끼는 까닭은 사실 보도 자체가 왜곡된 인식을 가진 이들에겐 확인사살의 강력한 무기가 된다는 한국의 현실때문이다. 또한 그들의 확인사살 조준 과녁엔 남성이 비켜 서있고 여성만 정조준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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