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화려한 모순

조선일보 창간 80주년에 부쳐

등록 2000.03.05 22:14수정 2000.03.06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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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가 창간 8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3월 4일판 총 80면짜리 신문은 그 역사만큼 방대한 분량이다. 특히 제 8면을 가득 채운 천백여명의 화려한 축하객 명단은 조선일보가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창간특집호의 제 1면에 실린 "상소의 정신으로"란 제목의 사설이 유난히 주목을 끈다.

사설에서 조선일보는 조선시대 유생들의 상소정신으로 되돌아갈 것을 천명한다. "머리 끝이 쭈뼛해질 정도로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며", 생명의 위협속에서도 "노(No)"라고 말할 줄 알았던 강인한 선비의 정신으로 되돌아가겠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조선일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독자의 알 권리'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의 존재 근거를 독자 또는 국민의 권리에서 찾으려 한 점은 적절하다. 정부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국민이 알 권리가 있다는 개념은 정부의 권력 남용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되며 언론자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독자의 알 권리'를 주장하기에 앞서, 그것의 지적 연원이 일반시민에 대한 믿음과 낙관주의적 정신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정보가 충분히 주어진다면 인민은 올바른 결의를 할 것이라는 '일반의지'에 대한 장자크 루소의 믿음과 누구나 생각한 바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저 유명한 미국의 수정헌법 제 1조의 정신이 바로 '독자의 알 권리'의 고향인 것이다.

조선일보는 최근 시민단체의 정치참여와 관련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너도 나도 정치 참여하면"이란 제목의 1월 28일자 사설이 좋은 예이다. 시민단체의 낙천-낙선운동이 정치 혼란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짙게 깔린 이 사설은 시민과 시민사회에 대한 불신과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는 일반대중에 대한 비관주의를 쓰곤 하던 펜으로 갑자기 일반대중에 대한 낙관주의와 결연한 선비의 정신으로 '독자의 알 권리'를 지키겠노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이는 창간 80주년을 기념하는 화려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시민운동에 대한 견해를 바꿀 것을 조선일보에 요청할 생각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에 대해 본질적으로 우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조선일보가 좀더 겸손하고 솔직한 자세로 보도에 임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 자신의 존재와 영향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의 알 권리'라는 그럴듯한 수식어를 남용하지 말기를 부탁한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독자를 효과적으로 붙들어 두는 뛰어난 상술과 보수적인 정치 주장에서 나오는 것이지 '독자의 알 권리'를 수호하겠다는 봉사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창간기념호 총 80면 전체에 넘쳐나는 조선일보의 자신감은 그 권력의 크기를 느끼게 해줄 뿐인데, 지각있는 사람이라면 통제받지 않는 그 어마어마한 권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신이 가진 권력 앞에서 솔직하고 겸손할 때 최고의 민족정론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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