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0.03.07 00:53수정 2000.03.07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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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열풍이 불고 있다. 졸업요건에 '토익 몇 점 이상'이라고 못박아 놓은 대학이 생기는 등 이젠 영어를 못하면 취업이 안되는 것은 물론 당장 졸업도 못할 것 같다. 또 고시에 합격해 출세하고 싶어도 영어의 벽을 넘지 못하면 어림없게 됐다. 고시 응시조건에도 영어 점수가 요구될 예정이다. 초등학교에도 영어로만 진행되는 수업이 생긴다고 한다. 겁먹은 아주머니들은 짬을 내 동네 영어학원에서 만학의 열기를 불태우며 열심이다.
그런데 이렇게 영어 열풍이 일면서 영어는 의사소통의 도구라는 본질을 넘어서 그 자체로 절대시되고 있다. 국제화시대에 영어의 필요성에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모두가 영어에 매달리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인지, 영어를 못하는 것이 정말 그렇게 큰 문제인지는 한번 따져볼 일이다.
지금 우리의 영어 공부는 너무나 자기목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마치 돈이 인간생활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돈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인간이 돈을 벌기 위해서 살게 된 것처럼 말이다. 우리의 영어공부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잊어버린지 오래다.
그래서 우리는 영자신문을 읽고 국제정세를 이해하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영자 신문을 읽는다. 그리고 외국방송을 보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알기 위해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 청취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외국방송을 본다. 주객이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힘들게 영어를 마스터하면 그 다음은? 일 년에 몇 명 남짓 뽑는 영자신문에 입사한다. 몇몇 한국에 닻을 내린 외국 기업에 취업한다. 아니면 외국 인기서적을 번역한다. 그것 외에 그 빛나는 영어실력을 옭어먹을 수 있는 다른 방법은? 물론 조금은 더 있다. 하지만 영어를 공부하는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 모두가 필요할 만큼은 아닐 것이다. 영어를 정말 잘해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영어를 배웠다는 사실에만 만족해야 한다.
자신의 일천한 영어실력으로는 혼자 사전을 뒤져가며 낑낑대며 영자신문을 보는 것보다는 신문의 외신란을 보는 것이 훨씬 능률적이라는 것을, 불확실한 자신의 청취력에 의지해 영어뉴스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화면 밑의 자막을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쏟는 노력에 비해 영어의 생산성은 극히 미약하며 그 기회비용은 너무나 크다.
영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들고 나오는 영어 때문에 생긴 문제들, 이를테면 외교가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몇몇 잘못된 통역의 예들이나 심심찮게 발견되는 오역들은 영어를 꼭 잘해야 될 사람이 잘하지 못해서 생긴 일이지 우리의 영어열기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모두가 영어열병에 휩쓸려야 할 이유는 결코 될 수 없다. 영어를 진짜 잘해야 되는 사람만 잘하면 되는데 나머지 사람들까지 덤으로 영어에 강박을 느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은 애써 힘들게 직접 듣고, 읽고 이해하려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차라리 번역된 자료를 이용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하고 효율적이다. '영어가 경쟁력이다'는 말은 영어로 먹고사는, 그래서 방귀께나 귄다는 그런 사람이 아닌 이상 별반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다. 괜히 기죽을 필요 없다. 영어만 경쟁력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무한한 가능성의 여지를 스스로 소모하지 말자.
영어에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을 생각해볼 때 이는 사법시험이 초래하는 엄청난 사회적 기회비용과 닮아있다. 사법시험을 보자. 우리나라에서 '한다하는' 대학의 '난다하는' 수만의 학생들이 육법전서를 펴지만 그중 고시에 합격해 그 지식을 활용하는 사람은 불과 몇몇이다. 나머지 대부분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젊음의 열정을 온통 소진하고 좌절할 뿐이다. 법을 알면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는 하지만 들인 노력을 생각해 보았을 때 그런 위안은 너무나 옹색하다. 그들이 그 좋은 머리로 거기에 쏟아 부을 열정을 다른 데 기울였다면 훨씬 많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고시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 아무런 부가가치도 낳지 못하는 고시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수만의 사람들이 영어감옥에 갇히듯이 말이다. 무조건 국제화 시대니까 영어를 공부하자고 덤빌 것이 아니라 영어가 왜 필요한 지, 어떻게 필요한 지, 얼마나 필요한 지 등을 곰곰 따져보고 영어를 공부하든, 말든 해야한다. 그래서 영어가 자기 인생의 악세사리 정도일 뿐 그리 비중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과감히 영어책을 집어 던져 버리자. 제대로 된 번역기 한 대만 개발되도 해결될 일에 온 수고를 기울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주) 사실 저는 영어 좀 합니다. 군대도 카투사로 다녀왔고 영어에 적지않은 시간과 노력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영자신문을 읽으려면 하루해가 다 가고 AFKN은 몇 번을 반복해서 들어도 환청이 들립니다. 그런데 제가 영어를 잘 하게 된다고 했을 때 그걸 써먹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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