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사랑으로 살아왔어요" 할머니 관장 효숙 바우저

미국태권도대회 봄철 전국대회 취재기(3)

등록 2000.03.24 10:00수정 2000.03.2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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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명의 아들이 가장 큰 재산

현재 펜실베니아주 워딩턴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고 있는 효숙 바우저는 64세의 할머니 관장이다. 태권도를 시작한 지가 16년 밖에 안됐고 도장을 연 지도 3년 밖에 안됐다. 이 할머니 관장은 왜 늦게 태권도를 시작하게 됐을까? 바로 네명의 아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효숙 바우저 관장은 한국인이다. 한국명 박효숙.
1958년 미군 헌병이었던 남편을 따라 미국 땅을 밟은 박 관장은 미군을 따라 태평양을 건넌 여느 한국 여인들처럼 수많은 세월을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보내야 했다.

남편은 미국에 오자마자 자신을 모른 척하기 시작했고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거기다가 남편은 직업조차 제대로 갖지 않았고 3년 정도 다닌 공장에서는 바람까지 폈다.

박 관장은 이미 한국에서 낳아 데리고 온 큰 아들과 미국에 오자마자 낳은 둘째 아들을 생각하면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박 관장은 고생이라는 것에 이미 많이 단련된 사람이었다. 한국전쟁 때 피난생활을 했고 전쟁 후에는 춘천에서 오막살이 생활을 하며 금강운수에서 버스 차장을 하기도 했다.

아들이 없는 집안이라 자신이 아니면 부모님을 모실 수 없다는 생각에 박 관장은 열심히 운전을 배웠고 그 운전 실력 덕분에 미군 부대에서 일할 수 있었다. 썩은 감자를 먹고 살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경험했던 그였기에 남편의 무능력과 외면 속에서도 그는 아들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일했다.


채소도 내다 팔고 삯바느질도 했다. 남의 집 정원사나 가정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젖소 농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 그나마 알음알음 저축액을 늘려 그는 작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쳐다만 보면 한숨을 짓게 하던 네 아들이 이젠 다 큰 것이다. 박 관장은 그 네 아들을 두고 한명당 1밀리언달러라고 말했다. 모두 합해서 4밀리언달러라는 그 네 아들이 그가 성공했다는 증거다. 자그마한 식당과 나이트클럽, 태권도장을 경영하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이젠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아들들 때문에 태권도 시작

박관장이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계기도 아들 사랑 때문이었다.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을 태권도장에 보냈더니 검은 띠도 못 따고 동네 애들한테 맞고 들어오기 일쑤였다. 평소에 한국인 엄마를 둬서 놀림감이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너무 마음이 아팠던 박관장은 태권도를 직접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이들한테 자신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태권도가 어느덧 이제는 삶의 모든 것이 되고 말았다. 태권도를 시작한 후 아팠던 허리가 씻은 듯이 나았고 생활의 활력도 찾았다.

도장에서 70여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은 너무도 행복하다. 일년에 세번 열리는 미국태권도협회대회와 지역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큰 낙이다. 지난 1998년 세계대회 때는 겨루기에서 우승자가 되기도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자신의 도복 등에 써 있는 '98월드 챔피언'이라는 글자를 보여주었다.

비교적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박관장은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고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식당으로 향한다. 오후에는 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장 일을 마치면 다시 식당으로 향한다. 일찍 귀가하면 11시 30분이고 다 마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 새벽 2시에 귀가할 때도 있다. 이렇게 부지런히 생활할 수 있는 힘도 그는 다 태권도에서 얻고 있다고 말했다.

박관장은 자신의 삶에 대해 일말의 후회도 없다. 지금 미국엔 네명의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얼마나 자식들을 사랑하는지 그들이 다 몰라준다고 할 지라도 말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1년 반만에 자신의 동네에 자신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 한국 여인들이 들어왔다고 한다. 3명이 들어왔는데 모두 3년을 못 채우고 동네를 떠났다고 한다. 왜 그들처럼 떠나지 않았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박관장은 "그런 생각을 한 5년 동안 수없이 했지만 아들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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