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통합에 국민은 거수기로

'우리 농업·환경살리기 범국민서명운동' 문제있다

등록 2000.03.28 09:24수정 2000.03.28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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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오후 기자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명의의 공문 한 부를 팩스로 받았다. 단체의 '우리농업·환경살리기 서명운동'에 관한 질의회답으로 기자가 지난 10일 선관위에 보낸 질의에 대한 회답이었다.

기자가 지난 10일 보낸 질의는 '농협중앙회가 농협중앙회 각 지점과 지역본부, 산하 회원농협에서 일반시민과 고객을 상대로 벌인 '우리농업·환경살리기 범국민 서명운동'이 총선을 앞둔 시기에 여당이나 특정 정당의 출마후보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우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선관위는 답변을 통해 "농업협동중앙회가 그 설립목적과 관련이 있는 농업 또는 환경문제 등에 관하여 특정 선거에서 특정 정당 또는 후보자의 정강·정책과 관계없이 순수하게 농업·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의식의 제고 또는 관계당국에의 정책제시를 위하여 사무소를 방문한 고객을 대상으로 단순히 서명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상 제한하고 있지 아니하나, 선거기간중에는 경우에 따라 동 서명운동이 그 순수목적과는 관계없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이를 자제하여야 할 것임"이라고 밝혔다.

답변날짜는 24일로 명기되어 있었다.

선관위는 유권해석을 통해 명백히 농협중앙회의 서명운동이 "선거기간중에는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내고, 이에 따라 이 서명운동을 "자제해야 할 것"이다고 밝혔다.

농협의 서명운동은 오얏밭에서 갓끈매기

공문을 확인한 기자는 곧바로 농협중앙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그동안 홈페이지에 떠 있던 서명운동 게시판이 나타나질 않았다. 대신 행사안내에 이런 글이 올라와 있었다.


"우리 농업·환경 살리기와 협동조합 조기통합 500만 서명인 결의대회"란 제목 아래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을 비롯한 우리농업지키기운동본부, 경실련환경실천가족연대 등 사회단체들이 지난달 17일부터 실시한 「우리농업· 환경살리기와 협동조합 조기통합 범국민서명운동」이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마무리되었다.

이에 따라 농협중앙회노동조합(위원장 金昌權)은 농업·환경살리기에 대한 관심과 협동조합 조기통합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27일 오전 11시 중구 충정로 농협중앙회에서 『범국민서명 500만인 동참 결의대회』를 개최했다"는 농협중앙회 문화홍보부 홍보팀의 보도자료였다.


우연의 조화인가? 선관위에서 보낸 농협중앙회의 서명운동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는 공문을 기자가 받은 시기와 농협중앙회가 서명운동을 마무리하고, 결의대회를 개최한 시기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농협 홍보팀은 앞서의 보도자료를 통해 "지난 2월 17일부터 전국민을 대상으로 벌인 서명운동은 IMF와 최근의 농산물 가격폭락 등으로 어느때보다 농업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데다 협동조합의 조기통합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이 겹쳐 참여도가 대단히 높았다.

시작 1주만에 100만명을 돌파하더니 2주만에 350만명, 한달만인 지난 17일 당초 목표로 잡았던 500만명을 넘어섰다. 국민들의 사랑과 열망이 담긴 서명지만도 사과상자 30개분량이나 된다. 이 서명지는 청와대, 국회, 농림부, 환경부, 헌법재판소 등으로 보내 국정에 반영되도록 할 계획이다"고 서명운동의 성과와 향후계획을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국민의 사랑과 열망이 담긴 서명용지?

하지만 농협중앙회 측의 이러한 입장과는 달리 서명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전국농협노조(위원장 강근제)를 비롯한 농민, 시민들의 항의가 잇따랐다.

이 서명운동이 실시된 이래 전국농협노조는 "서명운동이라 하면 자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무소마다 배정을 주고, 배정대로 하지 못하면 촉구 문서를 보내면서 강제적으로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며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의 주관아래 이뤄진 이 서명운동을 즉각 중단할 것을 계속 촉구해 왔다.

농협노조는 특히 서명용지에 "농업인의 분열방지와 경제적 피해 최소화를 위해 협동조합 통합작업은 최단시일내에 이뤄져야 한다"는 문구가 삽입된 사실을 들어, 서명자들이 협동조합 통폐합에 찬성한다는 농림부와 농협의 여론몰이에 이용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전국농협노조 정현수 교육선전부장은 지난 14일 기자와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우리 농업 환경살리기 서명운동의 주관이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임에도 전국농협노조와 지역농협노조에서는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으로부터 서명운동 협조 공문이나 연락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밝
혔다.

정 부장은 그런데도 "서명운동 참여 단체로 참가하지 않아 서명운동과 관계도 없고, 서명운동을 독려할 자격도 없는 농협중앙회에서는 지역농협에 수없이 서명 촉구 공문을 발송하고 강제적으로 서명을 독려
해 왔다"고 지적했다.

즉 농협중앙회가 서명운동 독려 내용이 담긴 공문을 지역조합에 일일이 발송해 서명운동을 강제했다는 것이다. 농협노조는 그 증거로 농협중앙회가 지역조합에 보낸 공문과 각 지역본부별 서명운동 추진지표와 서명용지를 들었다.

전국농협노조는 "서명운동 참여단체도 아닌 농협중앙회가 서명목표를 5백만명으로 정하고, 지역과 개인별로 목표를 부여하고, 지역본부, 시군지부를 통해 지역농협에 온갖 강요와 협박을 통해 강제적으로 서명운동을 펼쳤다"고 말한다.

전국농협노조 반강제적 서명운동 지적해

과연, 전국농협노조의 주장은 사실인가? 이 단체의 주장에 신빙성을 더하는 사례를 기자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실제로 영문도 모르고 이 서명운동에 서명을 한 농민의 글을 확인했다. 지난 10일 전남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이학일 씨는 농협 홈페이지에 "농협중앙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강진읍 남성리에 사는 사람입니다. 농협에 볼일이 있어 갔더니 직원이 '서명을 좀 해달라'고 해 했는데, '무슨 서명이냐' 하면서 (직원에게)물었더니 '나도 모릅니다' 하면서 '그냥 중앙회에서 하라고 해 합니다' 하고 (직원이) 답변을 하면서 '아는 사람 있으면 몇 사람 더 적으라'고 해 적었는데 괜찮습니
까"라는 글을 올렸다.

지역농협 직원들이 중앙회의 일방적인 지시에 따라 농민들에게 서명을 요구하고, 아무런 사전 설명도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또한 '몇 사람 더 적으라'는 농협직원의 요구에 이씨가 '적었다'고 밝히고 있다. 즉 본인이 아닌 제3자가 서명을 대신했음을 밝히는 사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민원인도 농협 홈페이지에 "농협살리기? 서명? 엉뚱한 사람 이름 적어놓고, 한 사람이 여러 명의 이름을 도용해 적어놓고... 이것이 농협살리기란 말인가"며 서명운동을 꼬집고 있다.

기자도 지난 3월초 농협 가락동 지점에서 아무런 설명없이 똑같은 서명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한 경험이 있다. 당시 이 지점의 서명용지에 많은 시민들과 고객들의 사인이 기재되어 있었음을 볼 때 이같은 반강제적 서명이 전국적으로 이뤄졌음을 추측케 하는 대목이다.

농협중앙회는 앞서 보도자료를 통해 '협동조합의 조기통합을 바라는 시민들의 열망이 겹쳐 참여도가 대단히 높았다. 시작 1주만에 100만명을 돌파하더니 2주만에 350만명, 한달만인 지난 17일 당초 목표로 잡았던 500만명을 넘어섰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농협중앙회의 이런 대단한 자랑(?)과는 달리 앞서의 사례를 보면, 농협중앙회가 말하는 우리농업 환경살리기 범국민서명운동의 실상은 농협중앙회의 주장처럼 국민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해서 이뤄진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는 사람 있으면 몇 사람 더 적어 넣어라'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왜 총선을 코 앞에 앞둔 시기에 이런 무리수를 두어 가면서까지 서명운동을 실시했을까?

이에 대해 전국농협노조는 성명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농협중앙회가 당당히 본 서명운동의 주관단체 또는 참여단체로 참여하지 못하고 서명운동 실적에 집착하는 모습이나, 4월 13일 총선, 5월 13일 통합중앙회장 선거, 7월 1일 통합협동조합법 시행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기에 협동조합 강제적 통폐합을 찬성하는 문구를 중간에 끼워 넣어 서명을 받고 있는 점을 비추어 볼 때 이번 서명운동은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벌인 이 서명운동이 7월 통합협동조합 출범을 앞둔 농협중앙회가 축협 등의 반발을 서명운동이란 형식을 빌어 사전 차단하려는 의도가 담겨있지 않냐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27일 서명운동 동참 결의대회를 마침으로써 '우리 농협 환경살리기 서명운동'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기자가 그동안 이 서명운동을 둘러싼 공방을 지켜보면서 가진 의구심은 한마디로 이 서명운동이 '오얏밭에서 갓끈매기'란 것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통합협동조합의 출범을 앞두고, 협동조합 강제적 통폐합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축협을 비롯한 전농, 축산 농민들은 통합반대 집회를 개최했고, 계속적인 성명서 발표와 일간지 광고게재, 총선출마자 지구당 사무실 앞에서의 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반면 농협중앙회는 '협동조합개혁, 일선조합과 농어민을 위한 것입니다.(농림부 제공)'는 농림부의 주장을 여과 없이 홈페이지에 게시해 홍보를 하고 있다. 농림부 역시 농림부의 주장을 각종 성명서와 보도자료를 통해 계속 알리고 있다.

이러한 국면이기 때문에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주관이 되어 벌인 서명운동이 순수하게 받아들여지기 힘든 것이다. 더욱이 그 형식이 강제적인 성격을 띠고, 아무 내용도 모르고 서명을 하고 심지어 대필까지 한 농민들이 나타난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서명운동 과연 순수했을까?


이 가운데 농림부는 지난 25일 축협중앙회를 비롯, 농협, 인삼협 등에 공문을 보내 총선관련 선거운동 행위를 금지시켰다고 밝힌 바 있다.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농림부는 중앙선관위가 축협중앙회에 대한 지도 감독을 강화할 것을 정식 요청함에 따라 농.축.인삼협중앙회와 회원조합에 공문을 보내 '관련 법규에 저촉되는 활동을 할 경우 법령에 따라 처리할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에 앞서 중앙선관위는 지난 24일 축협중앙회에 보낸 공문을 통해 "최근 농.축협 통합 반대를 관철하기 위해 여러 지역에서 집회를 개최하면서 특정 정당 또는 입후보예정자를 반대하는 발언이 일부 있었다"고 지적했다. 선관위는 축협측에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의 반대나 지지 등 선거운동에 이르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또한 선관위는 감독관청인 농림부에도 산하단체에 대한 지도, 감독을 강화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선관위가 축협에 공문을 보내, 선거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자제할 것을 요청한 것과, 그 다음날 농림부가 농, 축협, 인삼협에 공문을 보낸 사실을 볼 때, 27일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서명운동을 마감하고, 결의대회를 연 사실을 단지 우연의 일치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

앞서 기자가 밝혔다시피, 중앙선관위원장이 농협측의 서명운동에 대한 질의회신을 한 날이 24일이었다. 선관위원장은 분명 이 서명운동이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민은 거수기로 이용돼

협동조합 통폐합을 둘러싼 논란은 총선 이후에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올 것이다. 이번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주관이 되어 벌인 서명운동은 단지 그 전초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서명운동에서 드러난 것처럼 농민과 시민, 고객들은 영문도 모른 채 농협중앙회 노동조합이 벌인 협동조합 조기 통합 달성의 주장에 이용당했다. 협동조합 통폐합이란 불씨에 많은 농민과 시민들이 특정한 한 쪽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는 거수기로 사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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