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론> 족보가 없어져야 한다고?

족보가 없으면 시험공부가 학문탐구가 되나?

등록 2000.03.28 11:33수정 2000.03.28 21:24
0
원고료로 응원
대학가만이 아니다.
시험이 존재하는 곳에 족보는 존재한다. 각종 입사시험, 국가고시, 대학입시, 운전면허시험 할 것없이.

시험문제는 정확한 답과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공정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되먹임이라는 학습의 방법으로 탄생한 시험의 태생적 요구인 것이다.

그런데, 시험이 감별의 수단으로 이용되면서부터, 문제와 답이 감추어지고 일부에게만 알려지고 독점되는 현상이 생겼다. 족보의 역기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누구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또 하나의 요점정리 교과서나 기출문제집에 불과한 것이며, 서로 눈치보며 '족보쟁탈전'을 벌일 이유도 없다.

"한 번 족보는 영원한 족보다"

학창시절 매년 똑같은 문제를 출제하는 교수는 이렇게 자기변명을 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항상 중요하고, 최소한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문제화하다 보면 그 문제가 그 문제다."

잘못 달아진 족보의 답때문에 몇 년씩 똑같은 틀린 답을 써내는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하고, 심지어 문제를 출제할 때 일부러 학생들 족보를 구해서 틀린 답이 달린 문제만 골라내는 얄미운(?) 교수도 있었다.


물론 지난해의 문제지를 그대로 복사하다보니 연도까지 틀린 문제지를 받아본 적도 있다. 이 교수의 불성실함이 족보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문제가 달라지면 족보가 없어지는 것일까? 족보에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는 것이 아닐까?

족보가 있어서 대학의 학문탐구가 방해받고 있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우리 대학 사회가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취직기술자 양성소'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이 오히려 족보를 요행과 술수의 수단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재 대학에서 대부분의 학과공부는 성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성적을 위해 하는 공부에 무슨 학문의 방법론과 원칙을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또한 족보문화는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지, 족보 스스로 가진 특성이 아니다. 오히려 족보는 나 이외의 타인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제를 외워 나오고 책을 찾고 답을 달아 후배를 위해 남겨주는 것이 족보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출제자가 무엇이 틀렸는지를 알려주기 위해 공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족보를 만드는 사람들'이란 모임이 있었다. 일명 '족만사'.

그들은 음성적으로 은밀히 누군가에게만 있는 족보를 찾아 틀린 답을 고치고 해설을 덧붙여 공개하고 나누어 주는 일을 했다. 잘 모르는 것은 직접 출제교수에게 물어서 답을 달기도 했다. '공부해서 남주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차피 시험이 차이를 두기 위해 이용되고, 능력의 차이와 경쟁을 피할 수 없지만, 단지 정보의 불공평함때문에 손해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자칫 학문이나 공부는 나누면 손해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학문의 목표는 널리 이롭게 쓰기 위한 것이다. 세칭 순수학문일지라도 인간사 어딘가 존재이유를 찾는다면, 혼자만 간직해도 좋은 것으로 남고자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족보를 욕하면서도 결국 족보를 쫓는 '족보인생'이 되고, 같은 문제를 내는 교수의 불성실함을 욕하다가도 '탈족의 쓴맛'을 보고 나면 문제의 수준을 탓한다.

족보가 요행과 술수의 상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은, 다만 사람들이 족보를 그렇게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책읽는 곳이 아니라 공부방이 되고 있다면 도서관은 없어져야 할 존재일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삼남매가 결혼할 때 엄마에게 해드린 진상품, 승자는? 삼남매가 결혼할 때 엄마에게 해드린 진상품, 승자는?
  2. 2 "아파트 단지 통행불가? 법으로 막자" 어느 건축가의 이색 제안 "아파트 단지 통행불가? 법으로 막자" 어느 건축가의 이색 제안
  3. 3 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단종 왕비의 한이 서린 곳인데 흔적조차 없는 사연
  4. 4 "우린들 새 잡고 싶어 잡겠나" 어민 절망 속 바다새 1만 마리의 죽음 "우린들 새 잡고 싶어 잡겠나" 어민 절망 속 바다새 1만 마리의 죽음
  5. 5 바다 위 흉물처럼...관광객마저 탄식한 동해안의 '상처' 바다 위 흉물처럼...관광객마저 탄식한 동해안의 '상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