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그 여자아이를 기다렸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남자아이가 나일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버스정류장에 나타나기만 하면, 한 눈에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 예감은 이미 지난 새벽에 그 아이의 사연을 접했을 때부터 계속되어 온 것이다.
비가 내렸다. 비가 오고, 해는 뜨지 않아 날은 더욱 더 흐렸다. 나는 우산을 들고 나오지 않은 까닭에 선 채로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비를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서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그 여자아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비에 옷이 젖는 일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점점 빗발이 굵어졌다. 정류장에 와 서는 사람들이 처량하게 비를 맞고 서 있는 나를 곁눈으로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나는 그 새벽에 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으며, 교복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들의 눈빛이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이마에서 빗물이 머리카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때쯤 내 머리카락은 물 묻은 셀로판지처럼 납작하게 늘어붙어 있었으며, 얼굴은 윤기를 잃어 점점 더 어두운 낯빛으로 변해가고 있다. 옷자락은 비에 젖어 축 늘어지고, 내가 평소 아껴 신는 검정색 가죽구두는 오물이 잔뜩 튀어 잿빛으로 얼룩져 있었다. 나는 사람들 눈에 내가 조금 이상하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눈앞을 가리는 장대비 사이로 한 여자아이가 길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를 발견하는 순간 내 심장은 심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 여자아이는 발목 위로 튀어 오르는 빗물을 피해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왔을 때, 여자아이는 빗물에 젖은 스타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다가왔을 때는 빗물이 치맛자락에까지 튀어 오르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나는 한 눈에 그 여자아이가 나만큼이나 깔끔을 떠는 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물에 젖어 잔뜩 오그라든 내 옷자락과 더러운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제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 이미 무릎이라도 꿇고 앉아 그 아이의 치맛자락에 묻은 빗물을 닦아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 무릎은 이미 젖을 대로 젖었으니, 그 아이를 위해서라면 빗물이 흐르는 길바닥 위에 두 무릎을 꿇는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그때 이미 그 여자아이를 마음 속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 여자아이와 내 시선이 마주친 건 번개로 번득이는 불빛이 불현듯 사위를 대낮처럼 밝히는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번개에 놀란 여자아이의 눈동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입술 끝을 길게 잡아당기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여자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결코 나를 반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 표정은 오히려 뜻하지 않은 곳에서 기괴한 형체와 맞닥뜨린 사람의 겁에 질린 얼굴 표정이었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곧 나를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종아리 위로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나는 어쩌면 내가 사람을 잘못 알아본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아이는 곧 이어 도착한 버스를 타고 떠나 버렸다. 나는 이제 아무 데도 돌아갈 곳이 없었으므로 계속해서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다시 몇 대의 버스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가고, 십수 명의 여자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떠나갔다. 하지만 내가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아이는 여전히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비는 계속해서 내렸다. 나는 버스정류장에 서서 계속 그 여자아이를 기다렸다. 그날 아침, 나는 그 여자아이를 만나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아무 미련 없이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비 또한 지치지 않고 내렸다. 나는 마침내 내가 지난 밤을 꼬박 새워 기다렸던 것이 단지 이 비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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