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이와 첫 외식 갑니다

누가 결혼 3년까지는 꿀맛이라고 했던가

등록 2000.03.29 13:29수정 2000.03.29 17:1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얘, 걱정마라. 정 안되면 결혼 촛불은 내가 켜고, 신부입장은 외삼촌하고 하면 되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98년 3월 29일. 결혼식날 만큼은 안예쁜 여자도 예뻐진다는데 난 얼굴을 가득 찌푸린 채 대기실에서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1시 10분. 예식은 이미 시작됐어야 했다. 그러나 엄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덩달아 친구들이 가져오기로 했던 부케도 아직 없는지라 흰 장갑을 낀 손은 깍지낀 채 다리위에 올려놓은 상태다.


'왜 시작을 안한대?'
'신부 부모가 아직 도착을 안했대'
'어머 왜?'
'길이 무지 막힌대'
하객들이 웅성웅성 난리다.
"2시부터는 또다른 식이 있거든요. 어떡하죠? 지금 시작해야 할 것 같은데..."

"주례 선생님이 2시에 근처 예식장에서 또 주례가 있으세요. 너무 늦으면 안될텐데..."
식장 관계자와 주례 선생님이 저마다 사정을 늘어놓지만 나만큼 걱정되랴. 물를 수도 없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엄마와 시어머니가 절에까지 찾아가서 받아온 '길일'이라는데 하필 오늘이 '백중'이란다.
경부고속도로 가득찬 차들의 행렬. 그렇지 않아도 토요일인지라 봄놀이가는 차로 붐빌텐데, 산소가 많은 용인으로 몰리는 백중차량들까지 가세해 나의 결혼식을 방해하고 있었다. 고속도로-용인간 중계방송을 하면서 예식을 치러야 하나.

또 다시 10분. 외할머니 말대로 삼촌과 입장을 하고 외할머니더러 촛불을 끄라고 할까? 하지만 일생에 한 번뿐인 결혼인데...
10분만 더 기다려보고 안되면 최후의 수단을 쓰자. 더 이상 미룰 수만도 없어 식장측에 '30분까지' 봐달라고 말을 해버렸다.
또다시 1분. 2분.7분...
순간, 쿵쾅쿵쾅 우당탕탕.. 환갑이 넘은 아버지가 다급히 뛰어들어오고 엄마도 헐떡숨을 쉬며 뛰어온다.

정신없이 입장은 했는데 웬걸. 손이 비었잖아? 서울서 부케를 들고 오는 친구들은 아직도 도착을 안한 것이다.
'일단 이거라도 쓰세요'
옆 예식때 썼던 부케가 허탈한 내 손에 들렸다.
허둥지둥 주례사가 이어진다.
"저... 부케 좀 이걸로 바꾸세요'


뭐야 이건 또. 흰백합 부케가 분홍 장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얘, 이모들도 왔다. 사진이라도 찍자"
"야, 다시 물러라. 가족사진 못찍었잖아"
폐백까지 마치고 나오는데 그제서야 지각생들이 몰리며 한마디씩 사정을 뱉는다.

2시 30분이나 돼서 도착한 친구들과 부케도 웨딩드레스가 아닌 한복을 입은 내 손에 쥐어진다.


그로부터 730일...

결혼식날부터 어수선했던 우리부부의 신혼생활은 복잡다난 그 자체였다.

맞벌이인지라, 아침마다 한바탕씩 전쟁을 치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나마 내가 서울로 직장을 옮긴 탓에 요즘은 하루 2시간 얼굴보면 많이 보는 것이다.

휴일? 결혼 3년까지는 꿀맛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그 흔한 교외 나들이도 없다. 그 흔한 외식도 없다. 그 흔한 영화구경조차도 우리에겐 남들 얘기일 뿐.
그럼 휴일엔 뭐하냐고?
때때로 휴일까지 미뤄지는 회사업무가 대부분이다. 그나마 쉴 수 있다면, 마치 10년을 산 부부처럼 늘어진 낮잠에 밀린 빨래, 청소로 한나절이 쉬익.

고작 오락이라고 해봐야,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최신 비디오테잎을 빌려 영화 한 편 감상하는 정도인데, 그나마도 졸려서 며칠에 걸친 연속드라마를 보는 것이다.

다행히 서로의 일을 이해해준다는 것 때문에 우리 부부가 이만큼 살면서 큰 다툼이 없었다는 것에 스스로를 위안삼을 뿐. 젊은 결혼시절은 직장에 담보잡혀 물 흐르듯 흘러갔다.

하지만. 후배놈들이 '결혼하니까 뭐가 좋던가요?'라고 물으면, '글쎄... 해도 아쉽고 안해도 아쉬우니 알아서 결정하렴'이라고 두리뭉실한 대답 밖에 못해줬던게 내 처지.

그러던 어제.
"000씨가 누구죠? 꽃배달 왔습니다."
'어? 뭐야. 누가 보낸 건데요?"
"안에 카드가 있으니 보시죠"
생각지도 않았던 남편이 일을 벌인 것이다.

2년을 함께 살았지만 분위기라곤 모르던 내 남편이 보낸 장미꽃.
직장 동료들 앞에선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뭐야, 보낼려면 내 나이에 맞춰 서른 송이를 보낼 것이지 16송이가 뭐야"라며 투덜대며 받았지만,

무뚝뚝하기만 하던 내 남편이 이런 이벤트를 벌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나 생각하니 속으론 가슴이 벌렁벌렁 그 자체다.

난 오늘 회사를 쉬었습니다.
장미꽃 속에 묻혀있던 카드에 적힌 남편의 명령을 듣기 위해서죠.
아침부터 회사에서는 '집에서 시간도 많을 테니 2시까지 기사를 송고하라'고 했지만 오늘은 쉴랍니다.

그리곤, 한 껏 차려입고(?) 우리 그이랑 외식하러 갑니다.
결혼 후 처음입니다.

오늘을 계기로 우리 결혼생활도 어느덧 좀 더 좋게 발전하리라고 믿어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마이뉴스에서 일합니다.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은솔아, 돌잔치 다시 할까?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한국 지천에 피는 벚나무, 이런 숨은 사연 있습니다 한국 지천에 피는 벚나무, 이런 숨은 사연 있습니다
  2. 2 "66세에 갈 곳 있어 행복,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 "66세에 갈 곳 있어 행복, 대한민국 참 좋은 나라"
  3. 3 농촌 사는 청소년들에게 돈을 줬더니, 벌어진 일 농촌 사는 청소년들에게 돈을 줬더니, 벌어진 일
  4. 4 10달러 지폐 모델이 누구길래... 2026년 미국을 강타하다 10달러 지폐 모델이 누구길래... 2026년 미국을 강타하다
  5. 5 헌재 "대법 확정 판결도 1심서 문제 발견되면 처음부터 심리" 헌재 "대법 확정 판결도 1심서 문제 발견되면 처음부터 심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