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그렇듯이 올해 5월도 여기저기 '인권'을 주제로 한 행사들이 많다.
19, 20일엔 지리산 자락 구례에서 '동아시아 평화 및 인권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19일의 주제는 정신대 할머니, 장기수 할아버지와의 대화의 시간이 마련된 날이라 광주 '통일의 집' 선생님들이 모두 구례에 가셨다.
문득 병원에 혼자 계실 김인서 선생님 생각이 났다. 오늘 같은 날 선생님도 하실 얘기가 많으실텐데 혼자서 병실을 지키실 생각을 하니 괜히 내 맘이 그렇다. 말벗이라도 돼드리고 싶어 초등학교 3학년 조카를 데리고 기독교 병원으로 나섰다.
"장 누구 선생님이라구, 이모?"
"북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어?"
장기수 선생님을 뵈러 간다는 말에 조카의 질문공세가 시작됐다.
"김인서 선생님은 75살이셔. 평안남도가 고향이시지. 6.25전쟁 때 경찰에 체포되셨어. 그래서 37년을 감옥에서 사신 거야. 이제 연세도 많이 드셨고 몸도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많은 사람들이 고향인 북한으로 보내드리자고 하고 있어."
선생님은 97년부터 중풍으로 병환 중이다.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2월에 잠시 퇴원하셨었는데 또 다시 4월 4일 입원하게 됐다. 신경쇠약에 C형 만성간염까지 겹쳐 기독교 병원 611호에 누워 계신다.
오후 5시가 다 된 늦은 시간 병실에 도착했다. 마침 천안에 있는 성당에서 자원봉사자로 가끔 오시는 수녀님이 계셨다. 손을 꼭 붙잡고 "건강해 보여요"하며 밝게 인사를 드렸지만 많이 기력이 쇠하신 게 느껴져 맘이 아팠다.
선생님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어린 조카에게서 눈을 뗄 줄 모르신다. 발음이 정확치 못한 선생님은 조카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발음도 발음이지만 사투리 섞인 말투를 조카는 도무지 알아듣지 못해 중간에서 통역을 하는 내가 웃음이 난다.
"선생님이 예전보다 많이 안좋아지셨어요. 어쩌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수녀님은 눈으로 걱정스러움을 전한다. 며칠 전부터 선생님은 밥대신 죽을 드신단다. 손에 들고 온 복숭아 통조림과 음료수, 과자 봉지가 부끄러워 조용히 내려놓았다.
병원에서 저녁을 드신 선생님은 오랜만에 산책을 하자고 하신다. 요새는 사람들도 잘 안 와서 밖에 나가본 지 좀 됐다며 근처 양림교회 뜰로 나가자고 그러신다.
수녀님과 인사를 나누고, 병원에서 15분 거리인 교회로 휠체어를 밀며 나섰다.
바람이 꽤 차가웠다. 선생님은 양림교회 정원에 핀 철쭉과 나무들을 보며 알아듣기 힘든 혼잣말을 계속 하신다. "난 여기가 참 맘에 들어. 오래된 나무들이 얼마나 보기 좋아"그러시며 강원도 산불얘기를 하신다. 산짐승들이 얼마나 많은 곳인데 다 죽었을 거라며 "그래도 개구리는 나왔다 그러대?"하시며 웃으신다.
"다음 달이면 북으로 갈 수 있을 거야. 늦어도 8.15땐 가겠지."
침을 닦으시며 말을 이어야 할 정도인 선생님은 송환 얘기를 하실 때만큼은 유난히 목소리에 힘이 느껴지고 발음도 정확해진다.
국제사회에서도 그렇고 우리 문제 해결 안되면 이산가족 문제도 어렵다며 "이번엔 틀림없이 간다"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신다.
"북에 가면 딸들이 모시겠다고 하지만, 이미 가정 이루고 사는데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게 쉽겠어"
평양 외국어 대학에서 강사로 있는 큰 딸이 "만나는 날까지 건강해 달라"고 보낸 편지 얘기를 꺼내며 잠시동안 말을 잇지 못하신다.
선생님은 북에 딸과 손자들이 있다. 두 딸을 두고 내려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학교 강사로 활동 중에 체포되셨다. 20년 복역을 마치고 75년 출소됐지만 또 다시 사회안전법에 의해 감호처분으로 구속된 것이다.
88년에 올림픽을 치루는 나라에서 반인권적인 '보호감호'가 왠말이냐는 국제적인 지탄을 받자 89년 사회안전법이 폐지되어 석방되셨다.
석방된 후 63세의 나이로 채석장 노동과 막노동 등 고된 일을 하시다가 조선대 구내서점에 취직하게 됐는데 96년 경영상 어려움으로 문을 닫게 돼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돼버렸다. 그리고 전쟁과 감옥에서 얻은 상처, 고령의 나이로 병까지 얻어 이젠 하루빨리 고향으로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김인서 선생님은 함세환, 김영태 선생님들과 함께 '포로출신 비전향 장기수'다. 전쟁포로에게 사상을 전향하라고 하더니, 이젠 남북회담 한답시고 이 분들을 두고 흥정을 하고 있고 참으로 우스운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날이 어두워지는 줄도 모르고 선생님과 송환 얘기를 한참 나눴다. 병원에 들어가는 길에 선생님과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이기적인 생각에 카메라를 들고나섰는데, 사진을 찍자니까 선생님이 더 즐거워하신다.
다음에 올 땐 사진을 가지고 오겠다고 약속하고 병실에 눕는 선생님 모습을 뒤로 한 채 병원을 나섰다.
수십 번을 읽었지만 지금도 읽으면 눈물이 난다는 <내가 만난 북녘 사람들>을 아직도 병실 머리맡에 두고 계시는 선생님.
아무 것도 모르는 우리 조카에게까지 복사해둔 신문기사를 건네며 들떠 있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순진해 보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조카는 '비전향 장기수 송환 주장 가능성'이라는 제목의 신문기사를 유심히 들여다 보고 있다.
고향에 가게 돼서 다행이라는 조카의 바램과, 이미 마음은 북한에 가있는 흥분에 가득 찬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기념사 등에서 입버릇처럼 내뱉는 '민주주의'와 '인권'이 아닌, 학술대회장에 앉아 토론에 그치는 탁상공론 아닌, 인륜과 인권의 차원에서 장기수 선생님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장기수 선생님을 두고 흥정하는 일 그만두고 조건 없이 보내드려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 비전향 장기수 선생님들은 전국적으로 94명 계십니다. 현재 광주지역에는 여섯 분이 있습니다. 선생님들께는 편지 한 통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광주 통일의 집:광주 북구 두암2동 29-25(우 50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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