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숨길 수는 있어도 책갈피마다 손때가 묻은 애정어린 마음까지는 숨길 수가 없듯이, 나는 블레이크를 생각할 때마다 매양 그의 천재성에 시새움을 금할 길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적인 추상>에는 내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핍진(逼眞)한 이해가 들어있을 뿐더러, 그의 시를 통해 어디로 가야할 지에 대한 답을 구한 체험이기도 하며, 그의 시를 통해 단자(單者)를 넘어선 까닭이다.
또한 사람의 머리 안에서 자라난 인간에 대한 추상적인 이해가 비로소 그 울타리를 넘어 지옥에 다다른 시절이기도 하다. 지옥, 그러니까 이 말은 유대 총독이 바울에게 한 말(바울이여, 그대가 미쳤도다)에 다름아니다.
지옥은 스스로 겪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 다시말해 죽음을 통해 부활을 체험하지 않고서는 그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없듯이 지옥을 체험한 므이쉬킨 공작과 그리스도와 블레이크는 각각 조금씩 다른 어법으로 지옥을 통해서 더 적확하게는 부활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인간적인 추상>이란 <지옥의 격언>을 말하기 위해 에둘러 표한한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사랑의 다른 이름들을….
그러나 이 글을 읽고 호승심을 이기지 못해 그의 책을 접할 수도 있는 미지의 독자들은 대부분 당혹스러울 것이다. 그것은 하이네라든지 헤세가 아니면 릴케와 같이 말랑말랑한(?) 종류의 책읽기가 아닌 까닭이다.
또한 그것은 아무리 사랑을 달리 불러도 '사랑은 달콤한 것이다'라는 굳은 믿음을 가진 이들에겐 치명적이다 못해 자칫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독과 같다. 그러니 그런 분들에겐 단재가 왜 저주론을 역설했는지를 암시하고 넘어갈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덧붙이는 글 | 『지옥의 격언』
W.블레이크(William Blake)
태학당 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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