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정리: 오연호 이한기 이병한 김미선 기자
"요즘 베트남 정글에 빠져 있습니다."
<한겨레21> 김종구 편집장(43)은 인터뷰가 예정된 3시보다 20분 빠른 2시 40분께 <오마이뉴스> 편집국에 도착하면서 그렇게 농담을 하면서 활짝 웃었다.
김 편집장의 손에는 굵직한 기사 파일이 들려 있었다. 그동안 <한겨레21>에서 보도한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에 관한 것이었다.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에 관한 <한겨레21> 보도는 지난 6월 27일 대한민국 고엽제후유의증전우회(이하 전우회) 소속 2000여 명이 한겨레신문사를 폭력 난입했던 사건의 발단이 된 기사이기도 하다.
김 편집장은 '전쟁 중에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명제 아래 더 이상의 전쟁이 발생하면 안된다는 취지로 베트남전 문제를 줄기차게 보도해왔고 앞으로도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베트남의 진실을 보도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인식이 베트남전을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싸움이었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참전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면서 "왜 그 전쟁에 참전해야 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한 국민적 인식의 제고 차원에서라도 <한겨레21>은 후속 보도를 계속할 생각이다"고 말했다.
약 2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한 김 편집장은 15년차에 접어든 기자 생활에 대한 소회도 덧붙였다.
[열린인터뷰 동영상보기]-임유철 기자
1.한국에 잘못 알려진 베트남 전쟁
2.네티즌에게 한마디
- 시간을 내줘서 고맙다. 마감기간일텐데.
"맞다. 모든 게 한꺼번에 걸려 있다. 항의방문단에 대응하랴, 다음호 준비하랴...오늘 금요일부터 마감이 시작된다. 토요일에 절반 가량 마감하고, 월요일에 나머지를 마감한다."
- 이번 사태에 대한 이야기가 이번 호에 들어가나.
"여섯 페이지 정도 잡혀져 있다."
- 김 편집장은 27일 전우회에서 한려레신문사 난입했을 당시 어디에 있었나?
"(전우회쪽에서) 오후 2시께부터 집회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3시께부터 전우회쪽 대표자와 한겨레신문사 편집국장 등이 만났다. 전우회쪽에서 대여섯, 한겨레쪽에서 나를 포함해 4명이 들어가서 요구 사항이 뭐고 해결방안이 뭔지 논의했는데, 사실은 일방적으로 욕을 얻어 먹었다.
그 분들의 말은 두 가지였다. 한겨레 보도 때문에 고엽제 환자 구제를 위한 소송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 '양민학살'이라는 톤으로 보도한 것에 대해 한겨레신문에 사과문을 게재하라는 것. 그 와중에 폭력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 폭력 사태가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나?
"전우회가 어느 단체들보다 과격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더욱이 경찰이 아침부터 대기하고 있어서 신문사 난입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는 과정이었는데, 갑자기 상황이 악화됐다. 격앙되고, 그 와중에 다친 사람도 있고..."
- 27일 사태가 격앙되었을 때 편집장으로서 어떤 심경이었나? 혹시 잘못 건드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안 들었나.
"별로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은 없었다. 한 번쯤은 예상을 했다. 베트남전 관련 기사가 실리는 동안 해병전우회나 베트남참전전우회로부터 항의 전화도 많이 받았고, '몰려온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말도 들었다. 뒤늦게 터진 것 같다."
- 베트남전 관련 첫 보도가 <한겨레21>에 나간 것은...
"99년 5월 6일자니까 4월 말에 쓴 거다. 처음 제기한 것은 베트남에 있는 구수정 통신원이었다. 구수정 씨가 베트남 전범조사위원회의 기록을 바탕으로 현장 취재를 해서 기사를 보내왔다."
- 통신원이지만 외부 원고인데, 편집장으로서 이것을 크게 지속적으로 보도해야겠다고 판단한 이유는.
"첫 보도는 '지구촌 특집'에 실린 것이어서 그리 크게 보도된 것은 아니었다. 구수정 통신원과의 신뢰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보도를 결정했다.
사실 베트남 양민학살에 관한 문제는 이전부터 술자리같은 데서 무용담처럼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 당시 대단한 자랑인 것처럼 이야기하던 사람도 있었고, 주변에서 양심에 가책을 느낀 사람도 있었다.
증언이라는 것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조금 과장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인 팩트(사실) 관계에 있어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 초기 보도를 보면 구수정 통신원이 현지에서 쓰고 <한겨레 21> 내부 기자들은 좀 뒤늦게 결합한 것 같은데.
"초기에는 어쨌든 피해자 증언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첫 기사는 구수정 통신원의 워밍업이라고 할까. 그 다음 한국군 주둔지를 중심으로 해서 베트남 중부 5개성 등 수십개 마을을 직접 돌아다니고 100여 명을 만나서 생생한 증언을 채록했다. 그것은 9월 초에 보도됐다. 그때 특집으로 보도했다.
사실 고민도 많았다. 지금까지 그런 예가 없었고, 우리가 스스로 잘못을 저지른 것에 고백하고 까발리고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베트남전에 대한 사회 인식이라든가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심정들을 헤아려볼 때 부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크게 보도를 하자고 결정했고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 다음 이것을 어떻게 끌고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긴 호흡으로 이슈로 끌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망설였다. 취재의 어려움도 있고, 그 사안에 투입할 취재 인력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자의 반응이 열화와 같았다고나 할까. '왜 후속 보도가 없느냐' '진심으로 베트남 사람들에게 부끄럽다' '도울 길이 없느냐' 등. 그러던 차에 월간 <말>(99년 12월호)에 참전소대장의 고백 기사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에 자극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원이 부족해서 여기에 전적으로 매달리기까지 엄두가 안나는 측면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고경태, 황상철 등 2명의 기자를 전담팀으로 배치해 본격적으로 취재에 들어갔다."
- 이제껏 상당한 기간을 보도해왔는데 한겨레신문사 내부의 이견은 없었나. '베트남전의 성격은 다른 전쟁하고 다르지 않은가. 피아가 구분이 안되는 게릴라전 양상이어서 파병 한국군이 자기보호 차원에서 양민에서 총격을 가할 수도 있지 않는가'라는 식의.
"(한겨레신문사) 내부에서는 별로 없었는데 밖에서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첫째는 너희들이 전쟁해봤냐, 베트남전은 게릴라전이고 바로 옆에서 전우가 죽어나가는데 전쟁 속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그걸 갖고 왜 난리냐는 것이다. 또 베트남도 가만히 있는데 왜 우리가 그걸 갖고 난리냐, 주객이 전도된 것 아니냐 등의 외부 지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없었다. 한겨레신문 본지와 관련해서는 밖에서는 '한겨레21에 비해 좀 소극적이 아니냐'는 지적이 내외적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한겨레 본지도 4월 중순께 해병참전 중대장의 고백을 <한겨레21> 기사를 받아 1면에 실었다. 사실 해병 중대장의 육성 고백이 나가고 나서 선후배 동료들로부터 굉장히 많은 격려를 받았다."
- 중대장의 육성 고백은 제보였나?
"전담반을 구성하긴 했는데,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내가 했소'라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국회도서관의 파월 한국군 전사에 나와 있는 이름만을 가지고 그 사람들을 추적해서 여러 명을 직접 만났다.
그런데 만나면 아까 말했듯이 '니들 전쟁해 봤어?' 등 자기들의 처지를 설득시키려고만 했지 용기있는 증언은 안 나왔다. 그러다 2월께 베트남전 당시 중대장이었던 김기태 씨를 만났다. 크게 기대를 안했는데 의외로 용기있게 말해줬다. 그 뒤 바로 기사를 쓰지 않고 현지 취재 등을 통해 확인한 뒤 기사를 내보냈다."
- 아무튼 한겨레에 대한 집단항의가 계속되고 있는데, <한겨레21>에서는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보도할 생각인가.
"그렇다. 아직 이 문제가 매듭이 지어지지 않았고, 신문사 전체의 입장이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위협에 절대로 위축되거나 굴복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보도를 해나간다는 것이다. 전우회의 신문사 난입 사태가 앞으로의 보도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보도'인데 특별취재반은 앞으로 어떤 취재에 집중할 것인가?
"지금까지 나올만한 증언은 많이 나왔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작전기록을 찾아내지 못한 것인데...
1968년 1월말부터 2월까지 당시에 쿠앙남성에서 양민학살 사건이 문제가 됐다. 뒤늦게 문제가 돼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부에서 조사도 했는데 - 그 기록은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베트콩들의 소행이라고 천편일률적으로 수사를 마치고 말았다. 앞으로 남은 취재 영역은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인식이 베트남전을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싸움이었고, 우리는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참전했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왜 그 전쟁에 참전해야 했고,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고 있지 않다. 인식의 제고 차원에서라도 <한겨레21>은 후속 보도를 계속할 생각이다."
- 지금까지 베트남전을 끈기있게 보도해 왔는데, '베트남전이라는 것은 이런 전쟁이었습니다'라고 성격 규정을 한다면?
"참 어려운 질문이다. 역사적인 문제인데, 우리들의 식견으로 말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도 역사학자들이나 연구자들의 견해를 빌어 소개했다. 베트남전은 이런 것이다라고 성격 규정을 한다는 것은 외람되다고 생각한다."
- 베트남전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 가운데 가장 잘못된 것을 지적한다면?
"(베트남전이)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싸움이었고, 빨갱이들을 막기 위해서 월남에 가서 우리 한국군이 고귀한 피를 흘렸고, 그래서 양민학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전이라는 것이 베트남 내부의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미국이 끼어들었고, 미국이 한국군을 끌어들였고, 미국이 한국군에게 양민학살의 위험이 높은 험한 일을 시켰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폭격을 하고 한국군은 일대일로 대면전투를 하는 식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군에 대한 이미지가 더욱 과격하게 비춰진 것 같다. 근본적이고 원천적으로 전쟁의 양상이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나 한다."
- 지속적으로 보도하겠다고 했는데. 이 주제가 한 주간지 차원에서 계속 끌고 나가에는 버겁지 않을까 하는데. 한겨레 본지는 특별한 움직임이 있나.
"<한겨레21>은 최정상의 시사주간지이기때문에 이 문제를 끌고 가는데 버겁다고 생각지는 않는다(웃음). 본지에서도 많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안은 우리가 먼저 시작했고 축적된 노하우도 있기때문에 만족할만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는 할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와 병행해서 베트남 피해자 돕기 성금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지난주까지 9400만원이 모였다. 우리가 다른 모금 운동도 많이 해봤지만 이것은 아주 의미있는 성금운동이다. 여기에는 몫돈보다도 1만원부터 시작해서 2만원, 3만원씩 십시일반으로 모여진 돈이 9400만원이다.
애초에는 학교를 지으려고 했는데 더욱 절실한 것이 병원이고 그래서 병원을 지으려고 추진하고 있다. 지역은 푸옌성 투이호아 현에 지으려고 하는데 그쪽 하고 협의를 한 결과 그쪽에서 필요한 내과, 외과 등 50개 병상의 병원을 지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건물을 짓는데만 4억 정도가 든다. 앞으로 이 운동을 펼쳐 나가는데 오마이뉴스 독자들과 네티즌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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