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에 시비가 세워지는 '조운'은 누구인가?

국정원 개입설로 논란 빚은 월북작가 조운의...

등록 2000.08.31 11:11수정 2000.09.04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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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 직원 개입설이 난무한 가운데 지난달 22일 영광군 교육청 앞에서 조운 시인 시비제막식을 갖기로 했으나 하루전날 밤 9시경 시비가 훼손돼 제막식을 갖지 못했다.

지금도 사건의 진상은 가려지지 않은 채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에서는 국정원장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지만 얼마전 국정원에서는 '시비훼손에 개입한 사실이 없다'라고 공개질의서에 답변했다.


작가회의와 조운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등의 문학 단체에서는 오는 9월 2일 영광 한전문화회관 앞에서 시비제막식을 가질 예정이다.

시비 훼손사건으로 한동안 화두에 올랐던 조운 그는 누구인가를 알아본다.

투박한 나의 얼굴/두툴한 나의 입술//알알이 붉은 뜻을/내가 어이 이르리까//보소라 임아 보소라/빠개젖힌/이 가슴//
<조운.석류전문>

‘민족시인' 현대 시조의 교과서로 추앙받는 월북시인 조 운(曺雲·1900∼?).

조 시인은 지금까지 분단 이데올로기의 그늘에 가려져 햇빛을 보지 못하다가 지난 88년 정부의 해금조치로 주옥같은 그의 작품들이 일반에 공개돼 그후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재조명 작업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조운의 문학과 생활

조 시인은 1900년 음력 6월 26일 영광읍 도동리 136에서 창녕조씨 조희섭의 1남6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운의 본명은 주현(柱鉉)으로, 운(雲)은 필명인데 1940년 완전 개명했다.

자는 중빈(重彬)이며 아호는 기정(畸丁)이라 했다. 그의 어머니 김씨는 본처가 아닌 소실이었으며, 따라서 본처가 낳은 손 위 두형과는 이복형제인 셈이다.

그는 자신이 서출(庶出)임을 결코 숨기려 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4살때인 1903년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누이가 한집에 살았다.

일제 침략시대 민족의 수난을 같이했던 어린시절 문학의 꿈을 펼쳤던 당시는 시대적으로 무척 우울한 흐름의 연속이었다.

그는 20세 전까지 한문을 수학했으며 이외에도 일본시(詩) 및 서구시(詩)를 탐닉했고, 정상적인 학교수업으로는 영광읍 도동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 상업전수학교(현 목포상고 전신)에 유학했다. 19살때인 1918년 구식여성인 김공주와 결혼, 딸 둘을 낳은 뒤 1924년에 합의 이혼하고, 29년에 당시 영광 보통학교 교사였던 노성풍과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았다.

그는 1918년 부터 시창작을 시작하면서 1921년 동아일보에 ‘불살러 주오’를 발표해 등단, 1923년 영광중학원에서 작문과 문예교사로 재직하면서‘자유예원’이라는 문학서클을 운영해 지방문인들의 우수작품을 중앙문단에 소개·발표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특히 영광중학원은 영광 향교의 명륜당에 위치했으며, 이때 동료교사인 목포의 박화성을 발굴하게 되고, 박화성은 그의 지도를 받게되며 ‘추석전야’가 춘원 이광수에게 소개되면서 근대 여류소설가 박화성이 개화한다.

박화성 선생을 위해 지었다는 '野菊'

가다가 주춤/머므르고 서서/물그러미 바래나니//산뜻한 너의 맵시/그도 맘에 들거니와//널 보면 생각히는 이 있어/못견디어 이런다//
<조운.野菊전문>

조운은 ‘조선문단’2호(1924년 11월)에 ‘초승달이 재넘을 때’‘나의 사람’‘울기만 했어요’등 3편이 게재되면서 중앙문단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는데, 당시 조선문단 기자였던 소설가 최해서의 도움이 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해서와는 만주지방에서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됐으며, 나중에는 조 운의 여동생인 분려와 결혼해 그의 매부가 된다.

선죽교 선죽교러니 발남짓한 돌다리야/실개천 여윈 물을 버들잎에 덮였고나/오백년 이 저 세월이 지고 새다니//피니 돌무늬니 물어 무엇 하자느냐/돌이 모래되면 충신을 잊겠느냐/마음에 스며든 피야 오백년만 가겠니//포은만한 의열로서 흘린피가 저럴진대/나 보기 전 일이야 내 모른다 하더라도/이마적 흘린 피들만 해도 발목지지 발목져//
<조운.선죽교전문>

▲조운 활동 당시 시대적 상황

1919년 3·1운동 당시 엄중한 단속과 경계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참석했다가 위계후, 김형모, 유희기 등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져 만주 등지로 피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있는가 하면, 1926년부터 당시에 성행했던 프로문학(카프문학)에 대항, 가람 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파를 형성하고 ‘민족문학’을 주장했다. 1927년에는 ‘조선시인선집’‘이세기의 시인아’등을 발표하면서 예술성 높고 참신한 언어의 조탁, 서민의 애상을 그린 시조를 많이 써 이병기 등과 함께 현대시조의 선구자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조 운이 영광중학원을 그만둔 연도는 확실치 않으나 최해서의 ‘병우조운(病友曺雲)’을 보면 그는 이틀 먹을 양식이 없어 가난에 쪼들리고, 고독하고 서러운 사람으로 고창 선운사에 있다가 집에 돌아가 요양하고 있다고 적혀 있다. 또 1927년에 발표한‘병인년과 시조’가 병상에서 집필 됐다는 점을 볼때 조 운은 1926년 이전 병이나 술로 인해 생활을 비관, 1925년쯤 실직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1930년대 들어서면서 항일운동의 일환으로 독서회·추인회 등을 주도했으며, 1934년에는 30대를 전후한 지방 청년수양 단체인‘갑오구락부’를 만들어 서로의 지식과 예지 교환, 고서전람회, 문학강연회, 무용의 밤, 고전음악의 밤, 소인극회 등 각종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펴이어도/펴이어도 다 못 펴고/남은 뜻은//고국이 그리워서냐/노상 맘은 감기이고//바듯이 펴인 잎은/갈갈이/이내 찢어만 지고//
<조운.파초전문>

그러나 그는 1937년 9월 일본 경찰이 항일정신이 강한 영광청년들을 탄압하기 위해 거짓으로 반일 삐라(영광체육단체 사건)를 만들어 뿌리고 영광청년들에게 전가시켜 300명이나 잡아가둔 조작극에 연루돼 2년이란 세월동안 옥고를 치르게 된다.

현편 그는 1941년 정동운씨의 주선으로 당시 새로 발족된 조선 식량영단(대한식량공사 전신)영광 출장소 서무계장으로 취업해 4년 근무하다 해방을 맞는다.

그 당시 양분된 문단의 좌파인‘문학가 동맹’의 맹원으로 활동하며 민족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영광 민립 중학교(영광종고 전신)를 설립키 위해 정주연구회를 조직하고 회장직과 영광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47년 서울로 자리를 옮겨 그해 5월 73편의 시조를 정선해 첫 시조집‘조운 시조집’을 발간하게 된다. 그후 한동안 동국대에 출강해‘시조론’과 ‘시조사’를 강의하기도 했으며, 1948년말 월북을 단행하여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과 고전 예술극장 연구실장등을 지냈으며,1986년 서울신문(현,대한매일)에서는 소설가 박태원과 함께 조선 인민 예술학교 학장으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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