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 정책, 수구세력에 굴복하나

군사 문제로 발목 잡힌 남북장관급 회담

등록 2000.08.31 23:21수정 2000.09.01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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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지난 31일 막을 내린 가운데, 공동합의서 발표가 1일로 미루어진 것은 유감스럽다. 이런 해프닝은 회담이 열리기 전, 우리쪽 대표가 밝힌 의제를 보고 벌써 예상했던 일이다.

우리쪽은 북한에 군사용 직통 전화 설치 등 군축과 관련된 의제를 회담 테이블에 올려 놓았고, 이에 북한측은 우리의 을지 한-미 군사 훈련을 문제삼음으로써 우리측 제안에 대응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군사적인 문제 제기에 북한 역시 같은 성격의 내용으로 응수함으로써 장기적인 군축 협상을 오히려 어렵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회담이 되어버렸다.

8.15 이산가족 상봉 때만 해도, 우리 국민들은 군축 문제 등 남북한 당국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의제에 대하여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이산가족 상봉규모와 회수를 늘리고, 정례화하는 방안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것은 수구 언론들도 무엇보다 중시했던 내용이다.

그러던 것이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문제가 빠진 것에 대하여 남한의 수구 세력과 수구 언론들이 대대적으로 반발하면서, 이번 제 2 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며칠 앞두고는 아예 군축 협상에까지 자신들의 요구 범위를 확대해 버렸다. 이번 회담이 마치 남북 장관급 회담의 마지막이나 될 것처럼 야단법석들이었다.

장기수를 북한에 송환하게 된 마당에 국군 포로, 납북자 송환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남북 화해 시대에 군축 문제를 생략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오히려 개혁 세력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현 정권의 대북 정책에 지속적인 회의를 표해온 과거 회귀 세력, 흡수통일론자들에 의하여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땅에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을 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남북 화해와 신뢰 회복이 군축 문제로까지 확대되고 제도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남북자 문제, 국군 포로 문제, 군축 협상의 중요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번 한 차례 회담에서 그것을 모두 얻어내겠다는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번 회담에서는 남측은 이산가족 상봉 규모에 초점을 맞추는 선에서 만족하는 것도 괜찮았을 것이다. 회담은 상대방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방의 처지를 고려해 주는 것이 회담의 기술 아닌가. 납북자나 국군 포로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 규모를 늘려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실마리를 찾아가는 것도 현명한 차선책일 수 있었을 것이다.


군사용 직통 전화의 가설이나 군축 협상 같은 의제는 문제를 제기하고 다음 회담에서 다시 거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현재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오히려 더 나았을 것이다. 을지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 열린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북한이 군사적 의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북한이 군축 문제에 소극적임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을지 훈련의 축소 실시에는 노골적으로 못마땅해 하는 '이중적' 심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남북 화해 시대에 북한에서 군사적/정치적 양보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이산가족 상봉 마저도 보류해야 한다는 논리는 아닌가 의심스럽다.


더욱 더 못마땅한 것은, 이번 회담에 임하는 남측 대표단의 입장이다. 자신들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르기보다는 군축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수구 세력의 목소리에 기가 눌린 모습이었다. 남북 장관급 회담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사이의 간격이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 매달 한번씩 회담을 정례화하고, 시간을 좀 더 두고 민감한 문제를 단계적으로 해결해보려는 느긋함을 남측 대표단은 보여 줄 수는 없었을까?

이런 소극적 자세로 대북 정책을 효율적으로 펼쳐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갈수록 거세어져가는 수구세력의 현란한 논리에 장단을 맞추어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을 피할 수 없다.

김대중 정부와 민주당은 지금,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지던 대북 정책에 있어서도 정치력을 위협받고 있다. 이러한 처지의 본질은 국내 정치의 실패라고 단언할 수 있다. 정부의 역량이 대북 정책 하나로 평가받는다면, 이는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과거 회귀 세력, 수구 세력은 김대중 정부의 국내 정치 실패라는 허점을 집요하게 공략해 나갈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의도는 이번 제 2 차 남북 장관급 회담의 진행 과정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정부의 국내 정치 실패는 남북 관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협상의 상대는 상대편의 약점을 끝없이 고려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수구 세력의 주장에 의연하기 위해서라도 김대중 정부는 현재의 위기를 위기로 인정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성실하고 진지한 자세를 국민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수구 세력의 위협에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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