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광고 뒤의 출판 노동자

'자음과 모음' 해고사태 전말 "우린 70년대 공순이"

등록 2012.05.23 18:37수정 2012.05.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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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12년 5월 23일 오후 6시 45분]

 

7월 18일. 한 출판사의 거의 전직원이 실업자 신세가 됐다. 이유는 '항명'. 제헌절인 17일에 근무하라는 사장의 지시를 어겼다는 것이었다. 18일 회사 정문 앞에는 '회사사정으로 금일 사무실을 열지 아니하오니...'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자물쇠는 바뀐 상태였다.

 

결국 17일 결근했던 직원 20여 명은 며칠 후 짐을 싸서 나와야 했다. 왜 직원들은 사장의 지시를 어기고 출근을 하지 않았을까? 왜 회사는 '단 하루의 결근'을 이유로 전 직원을 '사실상 해고'했을까?

 

문제가 된 곳은 <용의신전> 등 판타지 소설로 잘 알려진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대표 강병철)'.

 

이 곳에선 7월18일 대량해고 사건 이전에도 비슷한 사례가 종종 있어왔다. 올해 초 편집1팀이 해체되면서 3명의 팀원 전원이 회사를 나갔고, 5월에도 기획팀 직원 1명이 부당 해고를 당했던 것이다.

 

도대체 '자음과 모음'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자음과 모음 전직원 해고사태의 전말을 소개한다.

 

"우린 70년대 공순이처럼 일했다"

 

자음과 모음 출판사의 내부사정은 타 출판사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조금씩 번져 나갔다. 주로 익명으로 쓰여진 게시물들에는 '간부직원들이 사장에게 불만을 품고 일을 저질렀다'는 의견부터 '황량하고 열악한 출판사 상황-자음과 모음 출판사만의 일이 아니다'라는 의견까지 다양하게 올라왔지만 사건당사자들이 입을 열지 않는 상태에서 그것은 '설'일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해고된 직원들이 실명과 신상을 밝히고 글을 올렸다. 김현수씨와 김영미 전 편집과장. 이들은 그간 '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적시해 놓았다.

 

최근 있었던 사건은 두 가지. 하나는 5월말 갑작스런 해고통지를 받은 김현수씨 건이고, 또 하나는 위에 소개한 7월18일 전직원 해고사건이다.

 

먼저 김현수 씨를 만났다.

 

"사장은 직원들에게 한 달에 30권의 목표가 적혀있는 일정표라는 걸 들고 와 무조건 일정을 맞춰 책을 내라고 지시했다. 직원 1명당 한 달에 1.5권씩을 맡아야 했다. 다른 출판사들은 월 10권 미만의 신간을 내는데 이곳에서는 30여권이 매달 나오는 거다. 직원들의 노동량도 노동량이지만 편집, 교열의 완벽성을 기하는 책을 기대하기란 객관적 조건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야근이 상시화 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는 6권 분량의 책을 읽고 다음날 아침까지 원고검토 소견서를 제출하라는 무리한 요구로 야근을 안 할 수 없게끔 만들었다."

 

전 기획팀 직원 김현수씨. 김씨는 입사 석 달 만인 지난 5월말 해고됐다. 김씨의 해고사유는 일일업무보고 내용이 (사장의)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 결국 김씨는 "쟤, 내일 아침에 정산해서 보내"란 사장의 말을 뒤로하고 회사를 나와야 했다. 김씨는 "하루평균 15시간씩 일했다. 한밤중에 집에 들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음날 지각하지 않기 위해 쓰러지듯 자는 것이었다. 사생활도 없이 피로회복제를 밥처럼 먹으며 '70년대 공순이처럼' 일만 했다"며 해고의 부당함을 호소, 노동부에 잔업수당을 받기 위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김씨는 그후 부당 해고 수당 1백만 원을 회사측으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노동부가 '지급 받아야 한다'고 판단해 준 '잔업수당'은 회사 측이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오랜 기간 지급을 미뤘다. 이에 대해 김씨는 "회사는 추석연휴기간에도 주요일간지에 전면광고를 냈다. 경영상의 어려움이라는 말은 이유가 안된다"고 반박했고, 9월16일에야 노동부의 중재를 통해 합의금 1백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뒤 이어 발생한 전직원 해고사건에 대해서 직원들의 주장도 김씨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장은 7월17일 전직원에게 근무하라고 했지만 직원들은 너무 지쳐 있었다. 툭치면 그대로 쓰러질 판이었다. 간부직원들이 사장에게 어차피 근무하지 말라고 해도 대부분의 직원들이 제헌절날 근무할 수밖에 없으니 근무령을 철회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사장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날 안나올 직원의 이름을 제출하라기에 2명을 제외한 전직원의 이름을 적어줬다. 사장은 나오지 않으면 모두 '해고'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현실화된 것이다."

 

김영미 전 편집과장은 그날의 사태에 대해 위와 같이 요약했다. 언뜻 생각하기에 전 직원이 집단으로 사장의 명을 어긴 것은 이해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김 전 과장은 "대부분의 직원이 1년 중 8시 이전에 퇴근한 것이 20일도 채 안 된다. 일부 직원들은 밤12시 넘어 까지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교정볼 것을 집으로 가져가 새벽까지 검토해야 사장이 요구하는 것은 다 채울 수 있었다. 더 이상 이런 비인간적인 노동에 얽매일 수 없었다는 것이 직원들의 분위기였다"고 답을 대신했다.

 

전 직원이었던 김 모씨(여)의 얘기도 비슷하다.

 

"어떤 때는 작가의 원고를 몇 개로 찢어서 여러 명이 교정을 보기도 했다. 판타지물의 경우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원고들은 문장 전체를 손볼 만큼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음에도 시간에 쫓겨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7일날 근무하지 않기로 한 것은 직원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의미였을 뿐이다."

 

"복귀하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20일 회사에서 짐을 챙겨 나온 20여명의 직원들은 대표를 통해 강병철 사장과 몇 차례 면담을 가졌다. 강사장은 떠나는 직원들에게 '3개월 이상된 직원들은 해고수당을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다음날 '복귀하라'고 입장을 바꿨다. 이어 특급등기로 '24일까지 복귀하라. 복귀하지 않으면 사직처리 하겠다'는 내용증명이 직원들에게 전달됐다. 해고 수당조차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들 중 서너 명은 다시 복귀했지만 그중 절반정도가 다시 회사를 나왔다. 그들은 다시 나온 이유를 사장의 괴롭힘 때문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이를 반증하듯 김 전 과장과의 만남에서 강병철 사장은 "내가 한 말 못 들었니? 전부 해고라고 했잖아"라고 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해고된 직원들은 새로운 직장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해고수당과 잔업야근 수당에 대한 문제제기도 점점 시들해져 간다.

 

"왜 문제제기를 본격화하지 않는가?"라는 물음에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여기에서 문제를 더 크게 확산할 경우 출판계에 다시는 발을 붙이기 힘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노동부를 통한 진정이든, 법을 통한 소송이든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소송을 통해 부당함을 개선하고 타 업종의 직장을 찾든지, 모든 걸 가슴에 묻어두고 다른 출판사로 옮기든지 중에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10월 설립을 준비중인 민주노총 산별노조 내 출판노조'에도 이들은 회의적이다. '같은 사무실에 있어도 일 때문에 얼굴 맞댈 시간이 부족한데 출판노조가 과연 잘 될 것인가'라는 이유 때문이다.

 

제2의 자음과 모음 사태가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은 다시 새로운 직원들로 채워졌다. 최근에는 근무시간도 단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적어도 겉으로는 평온한 분위기를 되찾은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모든 사태에 대해 '자음과 모음' 측은 말이 없다.

 

더 정확한 진상을 알기 위해 강병철 사장과의 인터뷰를 시도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9월 16일 어렵게 전화연결이 되었지만 강 사장은 "그 얘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며 전화를 끊었다.

 

97년 설립된 이래 판타지 소설계에 중심으로 자리잡은 도서출판 '자음과 모음'. 도깨비 방망이를 '뚝 딱' 쳐서 만들어내듯 하루 1권 가량의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사. 내용보다 일간지 광고를 통해 승부를 거는, 또 그런 승부가 먹혀드는 우리 사회. 그러나 화려한 광고 뒤에 감춰진 출판노동자들의 희생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2012.05.23 18:37 ⓒ 2012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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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23년차 직원. 시민기자들과 일 벌이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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