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의선 기공식과 증시폭락 사이

내정 '난조'가 가져온 반쪽짜리 기공식의 책임

등록 2000.09.19 11:21수정 2000.09.2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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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동맥을 다시 잇는 경의선 복원 기공식이 언론의 머리기사가 되지 못하는 예기치 못한 사태가 빚어졌다. 증시대폭락을 가져온 '검은 월요일'의 충격은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역사적 사건마저도 뒷전으로 밀어붙일 만큼 심각한 위기의식을 우리에게 불러일으켰다.

기공식 축제와 증시 객장의 한숨이라는 두 개의 대비되는 모습은 오늘 우리 사회가 서 있는 지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민족화해의 새로운 역사가 축제 분위기 속에서 열리고 있는 다른 한편에서는 경제불안, 의약분업 진통, 대출압력 의혹같은 혼돈들이 정리되지 못한채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경의선 기공식의 감격에만 젖어있기에는 증시폭락으로 퇴직금을 몽땅 날린 이웃의 사연이 너무도 애닯고, 수술조차받지 못하고 있는 암환자들의 고통이 너무도 안타깝다. 시드니에서 보내오는 화면에 대출압력 의혹을 받고 있는 모(某) 장관이 나타날 때면 참았던 울화가 한꺼번에 치밀어 오른다.

그렇기에 역사적인 경의선 기공식은 반쪽짜리 행사가 되고 말았다. 야당총재가 불참했기 때문에 반쪽행사라고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국민들 마음에 자리한 답답함과 불안, 그리고 울화가 기공식 행사의 의미보다 훨씬 더 피부에 와닿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 9월 18일 경의선 기공식장에서 손을 흔드는 김대중 대통령 ⓒ 오마이뉴스 이종호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나라는 이 모양인데 대통령은 기공식만 하고 있으면 다냐"며 불만을 토로한 사람들이 적지않았음을 알고 있다. 이들을 가리켜 '통일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식으로 간단히 말해버린다면 그것은 사태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의선 복원의 경제적 효과로 남북의 도약과 번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말만 믿고 있기에는, 공중에 날려버린 투자손실액이 너무도 크고 '제2의 경제위기'에 대한 불안감이 또한 큰 것이다. 무엇보다 터져나오는 문제들을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정부의 무능한 모습이 또한 원망스럽기만 한 것이다.

흔히들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외치(外治)에는 성공하고 내치(內治)에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남북관계에서는 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역사적 업적을 이루었지만, 우리 내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실패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김 대통령은 북한을 껴안듯이 야당을 껴안았어야 했다. 지금의 야당이 밉든 곱든 간에, 야당과의 기(氣)싸움은 대통령이 진두지휘할 일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갈구하며 살아왔던 사람이었다면 자신이 이끄는 정당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집권당이 지금처럼 허약하고 무기력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부의 치적을 말하기에 앞서 개혁의 미진함을 돌아보고 개혁의 고삐를 조였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심을 두려워 했어야 했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 숱한 의혹들을 덮어두고 대출압력 수사를 종결하려 했단 말인가. 박지원 장관이 진작에 물러나 철저한 수사를 받게하여 국민적 의혹을 해소했어야 했다.

어디 짧은 글에서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분명한 것은 지금까지와 같은 안이한 현실인식으로는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어느 곳 하나 제대로 굴러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대통령부터 비상한 상황인식을 갖고 위기를 극복해나갈 수 있는 특단의 대책들을 마련하는데 나서야 한다.

경의선 기공식이 국민의 관심을 충분히 못끈 것을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다. 눈앞의 혼돈들에 발목을 잡혀 민족화해의 역사적 의미조차 제대로 생각해 볼 여유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답답한 노릇이겠는가. 김 대통령은 이제라도 국민의 걱정과 실망을 덜어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외치(外治)의 성공이 내치(內治)의 실패를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내치의 실패가 외치의 성공마저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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