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집을 읽는 남자

홍성식의 百日詩話 83

등록 2000.09.22 16:11수정 2000.09.22 16:1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영미 시집을 읽는 남자

졸음에 겨운 밥벌레들의 순대 속 같은 지하철
거뭇거뭇한 중년의 남자
놀라워라, 시집을 읽는다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고개를 숙이고
관능과 퇴폐를 웅얼거리다가
퇴행성관절염의 역사를 되새김질하며
가끔 눈을 감는 남자, 저 남자
지하철은 한강을 건넌다
치욕을 허위허위 넘는다

검은 밤이 오면 저 남자
시집을 덮고 단란주점엘 가겠지
책장을 넘기던 손으로
어린 작부의 젖꼭지를 더듬으며
뱀의 침을 흘리겠지

아버지와 아들
엄마와 딸이 없는 시대
저 남자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


2000년 9월 22일

시작 메모


지난 주 세상을 떠난 황순원은 잡문을 안 쓰기로 이름이 높았다나. 그래서 그에게 배운 제자 문인들에게도 추모문 청탁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문학담당 기자들은 고백하고 있다.

글쎄, 시를 읽는 건 좋은 일이긴 하다. 그러나 최영미라... 호불호(好不好) 너무 분명한 내가 가진 약점에 의한 것이겠지만 그 중년의 사내가 왠지 안쓰러웠다. 책 선택권의 행사를 기껏해야 출판사의 광고와 떠도는 입소문에 기대야하는 우리나라. 하여 그 남자의 독서는 거지가 걸친 베르사체 코트같이 흉물스러웠다.


그 역시 시를 쓰는 내 선배 하나가 이런 말을 하더라.
"안도현과 김용택은 이제 '시인'이 아니라 '잡문가'라고 부르는 게 옳다"
월수가 30만원에도 못 미치는 선배가 쓰게 웃었다.

이런 말하면 욕 듣겠지만 해야겠다.
"도둑은 도둑질만 하고 시인은 시만 씁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두 권의 시집을 낸 쉰여섯 살 시인.


톡톡 60초

AD

AD

AD

인기기사

  1. 1 '의대면 끝'이라는 믿음도 깨졌다, 지방 의대서 무슨 일이 '의대면 끝'이라는 믿음도 깨졌다, 지방 의대서 무슨 일이
  2. 2 아이 낳고 떠난 아빠, 지금 한국서 벌어지는 'K-코피노' 아이 낳고 떠난 아빠, 지금 한국서 벌어지는 'K-코피노'
  3. 3 이진숙 국회 안 집회, 5.18 폄훼에 이 대통령 영정까지 등장 이진숙 국회 안 집회, 5.18 폄훼에 이 대통령 영정까지 등장
  4. 4 AI가 '인류 난제' 푼 이틀 뒤, AI 연구원이 보낸 끔찍한 경고 AI가 '인류 난제' 푼 이틀 뒤, AI 연구원이 보낸 끔찍한 경고
  5. 5 넷플릭스에 맞서는 1조 6000억의 베팅 넷플릭스에 맞서는 1조 6000억의 베팅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