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열리는 소리, "에밀레~~"

경주에서 맞이하는 나만의 개천절

등록 2000.10.03 18:18수정 2000.10.04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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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절반을 넘어갈 때쯤, 신문 기사 중에서도 사람들이 별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 지역면 한 귀퉁이에서 눈이 번쩍하는 기사를 봤다. 경주에서 송신된 그 기사에는 지난 92년,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로 중단된 에밀레종(국보 제 29호, 정식 명칭 성덕대왕신종) 타종식을 2000년 개천절을 맞아 다시 갖는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정확한 행사 일정이 알고 싶어서 경주박물관에 전화를 했는데 그 곳에서 하는 소리는 기사와는 달랐다. 김종오 학예연구사는 "잘못된 보도다. 확정된 것이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기였는데 잘못 나간 것"이라고 나중에 다시 전화해 보라고 했다.


이런 실망스러운 일이... 성급한 기사를 내보낸 기자에게 화가 났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는 버리지 않았다. 그래, 대망의 21세기가 아닌가, 천년 고도의 적막함을 뚫고 웅장한 에밀레종이 울린다면 그보다 더 멋진 드라마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로부터 일주일 뒤 실린 경주박물관장의 토막인터뷰에는 "안전성에 자신이 없다. 타종식은 없을 것이다"란 실망스런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치라고 만든 종을, 그저 모셔 두기만 하는 것이 선조들로서 퍽이나 답답한 일일 것 같지만, 후예들이 그렇다는데야 당할 재간이 없다.

그러나, 한 번 뽑아든 칼이니 나는 무라도 베야 했다. 2000년 10월 3일, 나는 지금 경주에 있다.

개천절 아침, 이른 시각이라서인지 뭉터기로 돌아다니는 관광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 혼자서라도 기념식을 치를 양으로, 에밀레 앞에 서 본다. 하늘을 향한 간절한 비나리를 몇 세기를 거쳐오며 그 자세 그대로 올리고 있는 비천상, 화려한 연꽃무늬를 새긴 종의 하단과 상단, 곧 날아오를 듯한 모습으로 소리통을 감싸고 있는 용뉴의 힘찬 용틀임... 어느 하나 허투루 만들어진 것이 없다. 그 웅장함 덕분에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고, 오직 하나 에밀레종이 있을 뿐이다"는 찬사를 받은 것이겠다.

아이의 손을 잡고 나들이를 나온 엄마, 아빠가 "이 종은 말이야, 소리가 안 나는 종이었는데, 아기를 제물로 바친 뒤에야 엄마를 부르는 애절한 소리, 에밀레~ 하고 울게 됐단다"는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어떤 유적에선 사실보다 전설이 더 힘이 세다. 에밀레종을 조사한 결과를 보면, 사람의 뼈를 구성하는 '인'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찌된 셈인지 그 전설은 누구나 믿는 사실이 되어 있다. 그만큼 이 종을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을 거란 얘기일 테니, 뭐, 굳이 그 사람들에게 가서 아니라고 말할 필요는 없겠지.

종신에 새겨진 글귀는 "...신종을 매달아 중생으로 하여금 일승의 원음인 종소리를 듣고 깨닫게 하려 합니다"란 내용이다. 경주에 살고 있는 사람은 물론, 이 땅 한반도에서 이 종소리를 듣는 누구나 세상의 진리를 깨닫고, 평화와 안녕을 갈구하게 하려는 장엄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신의 종. 실제로 명상에 열심인 이들 사이에선 이 종의 파장이 사람의 뇌파를 아주 안정적으로 만드는 데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되어 있다.


이 종소리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밝히려는 노력이 오히려,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활발할 정도다. 전쟁도 많고 시름도 많았던 삼국 시대, 어쩌면 이 종은 백성을 하나로 묶는 유일한 희망이 아니었을까...

드디어 10시. 댕~~~~ 어떤 의성어로도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종소리가 나를 휘감았다. 실제로 치는 소리가 아니라 녹음한 소리를 대신 들려주는 중이다. 종각에 있던 아이들은 "어, 에밀레~ 하고 안 울잖아"하고는 투덜댄다. 그 소리, 어떻게 들리던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 사람의 마음을 한없이 화평하게 가라앉히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오히려 마음이 설렌다. 12월 31일, 서울의 광화문에 울려퍼지던 그 종소리와 얼마만큼이나 다른지 어떻게 표현할 길도 없다. 다만, 그저 눈을 감을 뿐이다.


15번 종소리가 다 울린 후에야, 에밀레종 아래에 수백명 관람객이 몰려와서 떠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닫는다. 종이 울리는 동안 세상의 번잡한 소리는 전부 에밀레 속에 빨려들어가고 말았던 모양이다. 녹음한 소리가 이런데 하물며 진짜 소리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문득, 바보같은 생각이겠지만 성수대교니, 삼풍 참사니, 비행기 사고며, IMF 같은 것들이 92년, 이 에밀레종을 치지 않게 된 그 시점부터 생기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신의 비천상은 혹, 다시 자신의 소리를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종을 제대로 보존하는 일이 진정 그냥 그대로 두고 박제화하는 것이어야만 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녹음으로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는 건 너무 큰 실수는 아닌 것일까.

단군이 하늘을 열던 아주 오래 전의 하루가, 에밀레종 소리 덕분에 나에겐 현실인 듯 가깝다. 언젠가, 어느 귀퉁이에 에밀레종을 다시 친다는 기사가 나면 나는 또 달려오고 말겠지...

지금 내 가방엔, 박물관에서 산 에밀레종 소리 녹음 테잎이 세 개나 들어 있다. 서울에 가서도 나는 오래도록 그 소리에 취해 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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