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산에 묻힌 누이 찾을 수 있을런지...

회오리 역사에 빼앗긴 생애, 유랑의 새처럼 이국 땅에 정착

등록 2000.10.03 21:46수정 2000.10.04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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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을 작시(作詩) 한 박기동(82·호주 시드니거주) 옹이 29일 벌교에 도착했다. 먼 이국 땅으로 홀로 훌쩍 떠났던 유랑(流浪) 시인은 팔순의 노인이 되어서야 누이동생을 묻은 부용산 자락에 안긴 것이다. 54년만에 벌교를 찾은 노 시인은 흐릿한 기억으로 세월속에 묻혀진 부용산 오리길을 더듬었다.

지난 80년 아내와 사별한 그는 93년 혼자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짐승도 죽을 때가 되면 고향으로 발길을 돌린다는데 왜 칠순의 나이로 낯설고 물 설은 머나먼 땅으로 떠났을까?


부용산의 작자가 미상이었듯 아직 자신의 삶을 미상으로 남기고 싶어하는 그는 고국을 떠나 베일에 몸을 감췄다. 몇 차례의 질문에 마지못해 “비밀이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그 동안의 삶을 작품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할 뿐. 그리고 “가슴에 한이 맺혀 책을 쓰지 않고는 죽을 수 없다”며 마치 송곳으로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또렷이 말했다.

이 땅의 지식인으로서 양심을 지키며 산다는 일은 가시밭 길을 걷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었다. 그가 살아온 한국의 현대사는 죽임과 죽음, 굴종을 강요하는 야만의 폭력이 주인이었다.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나온 그 또한 고단한 지식인의 삶을 살며 양심의 외침에 괴로워했다. 자신을 송두리째 역사에 바칠 수는 없었지만 문학청년의 열정의 눈빛은 패륜의 시대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빨갱이도 아닌데 좌경시인으로 몰려 고초를 겪었다"면서 자신의 양심에 재갈을 물린 시대에 항변하듯 입을 열기 시작한 노 시인은 “시대를 비판하고 저항하는 시를 썼지만 빨갱이는 아니었으며 다만 낭만주의였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후락의 중앙정보부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몰아부치며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다”고 증언하는 노 시인. 야만의 권력에 상처 입은 그의 기억은 60년대 흑백사진에 갇혀 있었으며 그의 목청은 신음에 가까웠다.

야만스런 폭력에 의해 펜을 놓아야 했던 그는 아직도 문학청년이다. 호주에서 모국어로 시를 쓴다는 그는 시인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부용산 외에는 알려진 작품이 없다. 시작(詩作) 노트를 가택수색으로 압수 당하고는 더 이상 시를 쓴다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민을 떠나기 전 경기도 광주의 한 농촌에서 유기농업을 하며 자급자족 생활을 했다. 또, 경상북도 산중의 한 생식촌에서 머리 깎은 채 수도생활을 하기도 했다. 살생(殺生)의 시대와 어울리지 못한 채 야인의 생활을 선택하면서 상생(相生)의 삶을 모색했던 것이다. 31년째 요가를 즐긴다는 그는 호주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아 생활하고 있으며 하루 두끼의 채식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용산 작곡자 안성현 월북으로 금지곡 신세


부용산의 탄생은 누이동생의 죽음에서 비롯됐다. 한의사였던 부친 박준태의 3남3녀 가운데 차녀였던 애영은 18세의 나이로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을 갔다.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누이는 자식도 낳지 못한 채 1947년 폐결핵으로 순천도립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름답게 피어나지 못한 장미처럼 병마에 쓰러져 간 누이를 부용산 자락에 묻고 돌아선 시인은 복받치는 슬픔을 감추기 위해 순식간에 시를 적어 내려갔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천사 같은 아이였어요. 벌교는 물론 전남 동부6군에서도 소문날 만큼 그렇게 착할 수 없었는데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자식도 낳지 못하고 병들어 숨진 누이를 생각하며 한숨에 적어 내려간 것이 부용산입니다. 부용산은 초고를 쓴 뒤 한번도 손대지 않은 그대로 책상 서랍에 있다가 안선생의 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이렇듯 슬픈 내력을 지닌 부용산은 1948년 목포 항도여중에 함께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에 의해 곡이 부쳐지면서 목포를 비롯한 전남지역 곳곳으로 구전을 통해 퍼져나갔다. 그러나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의 작곡자이기도 한 안 교사가 한국전쟁 때 월북하면서 이 노래는 공식무대에서 사라져야 했다.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연유로 금지곡에 묶였던 부용산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던 지식인들과 대학 운동권에서 은밀히 불려지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세간에는 부용산이 이데올로기와 연관된 노래로 알려졌던 것이다.

목포·벌교의 부용산 친권논쟁 ‘제망매가’로 확인

부용산을 둘러싼 친권 논쟁도 치열했다. 그것은 목포의 ‘애제자’설과 벌교의 ‘제망매가’설의 줄다리기였다. 목포에서는 지난해 ‘항도여중의 애제자였던 여학생(김정희·당시 중3)이 폐결핵으로 숨진 것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노래’임을 확인 받기 위해 박기동 시인을 초청하기도 했다.

목포의 공세에 놀란 벌교에서는 부용산의 고향임을 확정받기 위해 시비 제막을 서둘렀다. 벌교읍번영회와 청년회의소(JC)는 벌교읍민의 날인 10월 1일 오후 11시 벌교읍 부용산 부용정 입구에서 시비(詩碑) 제막식을 갖는다.

이 같은 논쟁은 간단히 정리됐다. 29일 벌교에 도착한 박기동 시인은 목포는 곡이 만들어진 곳일 뿐 부용산의 고향은 벌교라고 말했다. 하지만 부용산은 이제 어느 한 지역의 산물이 아닌 민족의 노래와 이야기로 울려퍼지고 있다. 한 맺힌 역사의 줄기에서 탄생된 부용산에 문화예술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것이다.

대중가수 안치환과 이동원의 부용산 취입을 비롯 99년 5월 29일에는 소프라노 송광선의 부용산 음악회, 98년 소설가 정도상과 최성각씨의 ‘부용산’이란 제목의 작품발표가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연극인 김성옥 씨가 부용산에 대한 영화제작 의사를 밝히고 있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화씨가 연주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이와 함께 영암의 동아인제대 남도문화연구소(소장 김태형교수)는 부용산의 작곡자 안성현의 작곡집을 올해 안으로 출간할 예정이며 박기동 시인에게도 부용산에 대한 글을 받아 책으로 펴낼 계획이다.

시인의 고향은 이 땅에 없었다

박 시인의 고향은 예상과 달리 벌교가 아니다. 그는 전남 여천군 돌산읍 둔전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외삼촌이 설립한 둔전보통학교 4학년까지 재학하고는 가족과 함께 벌교로 옮겨 벌교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년 가량 만주생활을 하고는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굳이 말한다면 그의 고향은 이 땅에 없었다. 불운한 역사로부터 상채기를 입은 그는 이 땅에 머물지 못하고 도요새처럼 태평양을 건너 수 만리 길을 날아갔다. 그리고 슬픈 가족사로 인해 탄생되어 구전으로 불려지던 부용산은 주인공의 몸이 육탈이 되고 황토산이 되어서야 비로서 푸르른 가을 햇살에 눈물을 씻을 수 있게 됐다.

왜곡되고 미화되어온 오욕의 현대사로부터 테러를 당했던 노 시인은 거듭 자신의 이야기를 미화시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다만 부용산은 슬픈 노래였으며 자신은 실패한 인생이었다고 자책할 뿐. 조용히 왔다 조용히 떠나고 싶다고 말한다. 박기동 시인은 10월 20일경 홀로 돌아왔던 길을 홀로 떠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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