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일본근대사상대계 가운데 한 권인 <번역의 사상>을 편집하던 중에 가토가 마루야마와 나누었던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편집을 맡았던 마루야마가 건강이 좋지 못해 가토가 집필을 전담하게 되었는데, 둘 사이의 의견을 절충할 필요가 있어 수차례에 걸쳐 가토가 마루야마를 찾아 의견을 물었다.
두 사람의 지식은 참으로 해박하여 이들의 문답은 일본에서 번역 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 번역을 통한 외국 문물의 수입 과정, 번역이 일본의 사회·문화에 끼친 영향에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
적잖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학술용어와 일반용어의 상당 부분은 일본으로부터 전해졌다. 이 글을 읽으며 우리는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경제, 물리, 동산, 부동산과 같은 개념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18세기부터 외국어 사전을 만들고(현존 최고의 예수회 일본어 사전은 1595년에 간행되었다) 외국문물을 번역·수입하였던 일본인들의 저력에 놀라게 된다.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도올 김용옥은, "근세유럽에 있어서 마더텅(mother tongue)의 발견은 인류사의 획기적 사실이다. 중세기의 유일하게 쓰는 문자였던 라틴어가 자기가 엄마에게서 배운 말과 다르다는 엄청난 사실의 발견, 이것은 인간 이성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근세문명의 휴머니즘에 힘입은 하나의 혁명이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글 <번역과 일본의 근대>에서도 마루야마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던 에도 시대 오규 소라이의 선언이 콜롬버스의 달걀과도 같은 의식혁명이었다고 평하고 있다.
일본어와 중국어가 서로 다른 말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논어>와 <맹자>를 그대로 훈고하고 있다고만 생각했던 당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실은 이 모든 것이 번역에 불과하며 일본어도 수많은 언어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 일본에서 번역 문화를 꽃피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마루야마는 "결국 다른 문화의 이질성을 자각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인식하려는 욕구가 강해질 때에 비교적 독창적인 사상이 나온다"고 덧붙인다.
일본이 철저하게 번역주의를 취하게 된 배경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또한 적지 않다. 마루야마와 가토는 그 배경을 일본인들의 독특한 민족성에서 찾고 있는데,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졌을 때 그들이 취했던 태도와 일본인들이 보였던 태도를 비교해 보면 양국의 기질 차이를 잘 알 수 있다.
'예(禮)'와 '문(文)'을 강조하는 중화사상에 길들어 있던 중국인들은 홍콩을 빼앗기고서도 "어짜피 오랑캐니까 국토의 짜투리쯤은 줘버려도 돼"하고 쉽게 생각한 반면, 베이징으로 찾아온 영국 사절에게는 삼궤구배(三 九拜)의 예를 끈질기게 강요하였다. 나라 땅을 잃는 것보다도 자신의 체면을 잃지 않는 것을 더 중하게 여겼던 탓이다.
하지만, 정작 중국보다 더 큰 충격을 받고 전승국 영국을 알기 위해 애쓴 것은 중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일본은 사대부가 지배하던 중국과 달리 사무라이 전통이 지배하는 '상무(尙武)'의 나라였기에 이러한 패배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느꼈을 것이라고 마루야마는 추측한다. 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뒤에 일본이 점령국인 미국에 협조하고 미국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던 것과 괘를 같이 한다.
그렇다면 당시의 우리는 어떠하였고 지금은 또 어떠한가? 물론 우리에게도 아편전쟁(1840-1842)에서의 중국의 패배는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일본에 수신사를 보낸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후의 일이고, 그 때는 이미 세계사의 대 지각변동이 일어난 이후였다. 그 사이 30년 동안 일본은 많은 유학생들을 구미로 파견하고 각국의 서적을 번역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그 결실로 이 땅을 강점하고 동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일본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그 30년 동안 서구열강들이 크림전쟁, 남북전쟁, 보불전쟁 등을 치르느라 일본을 넘볼 여유가 없었지만, 우리로서는 너무나 불행하게도 채 근대화에 들어서기도 전에 열강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외국의 문물을 수입하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갈 수 있었던 일본과 달리, 우리는 타국의 문물을 이식(移植)당하며 점차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잃어갔다.
이제 세계는 대항해 시대와 비견할 만한 '인터넷 항해시대'로 접어들었다. 뒤늦은 개항으로 근대화의 질곡을 겪어야 했던 우리였기에, 정보화 시대에는 그 누구보다 앞서 나가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서둘러 고속통신망을 깐다고 해서 저절로 정보가 축적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근대화되지도 못하였고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니고 있지도 못하다.
최근 들어 프로이트 전집, 니체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등의 간행이 속속 이어지고 근대화 과정에서의 번역 문제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하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옮긴이의 말대로 "번역은 단지 외국의 개념과 사상을 수용하는 지적 행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는 문화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nmetro.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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