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혈캠페인, 이대로는 안된다

대한민국 헌혈캠페인에 대한 보고서 1

등록 2000.11.20 12:28수정 2000.11.20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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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 단어만으로 보면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아니 어떤 분들에게는 단어만으로가 아니라 너무나 익숙한 봉사활동일 수도 있죠.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단어로만 친숙할 뿐 그 행위 자체는 친숙하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은 우리나라의 헌혈캠페인의 실태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사실은 잠깐이 아니죠. 조금은 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 동안 신문이나 방송에서 헌혈 캠페인에 대한 문제를 매번 지적했지만 워낙 짧은 기사들이어서 단순히 혈액이 부족하다는 의미는 전달되었지만 우리의 헌혈 캠페인이 뭐가 문제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문제점을 말씀 드리기 위해 약간 긴 기사를 올립니다.

저는 최근에 우리나라의 헌혈캠페인에 대한 비디오저널리스트 르포 프로그램을 제작했습니다.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고 글까지 쓰다 보니 우리나라 헌혈캠페인의 문제점이 눈에 들어 오더군요.

먼저, 우리 나라의 헌혈의 역사는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연히 전쟁으로 부상자들이 많았으니 헌혈이 불가피했습니다. 그러나 헌혈캠페인이 시작된 것은 58년 대한적십자사가 국립혈액원을 인수하여 '적십자혈액원'이 탄생되면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자진 헌혈에 대한 인식이 낮아 필요한 혈액을 구하기 위해서 헌혈보다는 매혈에 의존했습니다. 너무나 가난하던 시절이다 보니, 자신의 혈액마저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사정이 나아지고 우리 나라도 국제사회의 발전에 맞추어 모든 것이 변화해 가면서 매혈은 금지되고 오로지 필요한 혈액은 헌혈에 의존하는 시대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74년 대한적십자사는 '세계 헌혈의 해'를 계기로 매혈추방 범국민 캠페인을 벌이는 등 본격적인 헌혈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법으로 매혈이 금지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입니다. 보건복지부는 98년 7월 28일 2000년부터 헌혈증서를 포함한 혈액의 매매행위와 알선,방조 등 그와 관련된 모든 행위를 전면 금지하는 혈액관리법을 입법 예고했고 이제는 정말로 매혈이 법적으로 금지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혈액을 매매하거나 알선,방조하는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게 됩니다. 또 혈장헌혈 등 '성분헌혈'에 대해 제한적으로 허용된 혈액제제의 매매행위마저 금지돼 혈액공급이 완전 헌혈제도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럼 서론은 여기 정도로 하고 우리의 헌혈 캠페인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지요.


지금은 겨울입니다. 우리는 매년 여름이면 각종 언론을 통해 혈액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겨울로 바짝 다가선 지금도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일선에서 헌혈 캠페인을 하는 사람들과 병원 관계자들이겠죠. 도대체 겨울에 혈액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우리 헌혈 캠페인의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헌혈 캠페인은 전적으로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현재 적십자사가 하고 있는 헌혈 캠페인의 방법은 서너가지 정도가 됩니다. 첫째로 가두에 버스를 세워놓고 지나 가는 시민들을 설득해 헌혈을 시키는 방법이 있고, 둘째로 학교, 직장, 군부대 등 각종 단체헌혈 방법이 있고 셋째로 고정된 여러 장소에 설치되어 있는 헌혈의 집을 통한 헌혈 방법이 있고 넷째로 비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각종 헌혈 이벤트를 통한 방법이 있습니다.


첫번째와 두번째 방법은 아주 오래된 방법이고 세번째와 네번째는 최근에 생겨난 헌혈캠페인의 방법들입니다. 그럼 문제점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언제까지 헌혈아줌마를 구경하여야만 하는가?

가두헌혈은 시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헌혈 캠페인입니다. 대한민국 성인 남녀면 다들 한번쯤은 길을 가다 가두에서 헌혈을 호소하는 일명 '헌혈 아줌마'들의 헌혈권유를 받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정확히 이 분들은 '가두 권장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가두권장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헌혈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심할 경우 옷자락을 잡고 따라가며 헌혈을 권유하기도 합니다. 흡사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모습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술을 먹었다', '약 먹는다', '어제 잠을 못잤다' 등 정해진 변명을 하고는 도망가죠. 아마도 사람들은 어떻게 대답하면 그냥 지나 갈 수 있는지를 다 아는 듯했습니다.

실제 이런 경우 헌혈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제가 인터뷰한 것에 의하면 열명 중 서너 명은 이런 행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너무 매달리면 헌혈하기가 싫어진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뭘 준다는 말을 하면, 헌혈하도록 유혹하는 것 같다'며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헌혈캠페인을 하는 쪽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가두권장을 하는 것은 사실 서울뿐입니다. 지방에서도 부분적으로 시행한 적이 있지만 거의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서울의 경우 필요 혈액량이 가장 많기 때문에 부득이 이런 가두 권장을 한다고 합니다.

한때는 서울에서도 이런 가두권장이 사람들의 헌혈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유발한다는 지적이 있어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단을 하고 나니 자진해서 헌혈하는 인원이 너무 적어져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97년 98년 가두권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헌혈자수는 예상밖으로 줄어들었습니다. 하루 삼사십 명이 헌혈을 한다는 종로 탑골 공원 앞 헌혈차의 경우 그 기간 동안 하루 열 명에서 이십 명 수준으로 헌혈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가두헌혈은 전체 헌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 될까요? 대한 적십자사는 매년 헌혈에 관한 각종 통계를 발표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98년도 그랬고, 99년도 그렇고 전체 헌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퍼센트 안팎입니다. 아주 적은 부분이죠. 물론 비중이 얼마 안되지만 가두헌혈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마저도 아쉬운 것이 대한 민국 헌혈캠페인의 실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 문제는 있습니다. 헌혈에 대한 국민 의식수준의 향상 없이 급하고 절박하다는 이유에서 현장에서 헌혈을 유도하면서 헌혈에 대한 의식을 개선하려는 것은 문제가 될 수밖에 없죠. 헌혈 선진국의 경우 제가 알기로 적어도 헌혈 가능한 나이 이전에 이미 헌혈 교육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자연히 헌혈 가능한 나이가 되면 헌혈 동참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마 현재 우리의 교육 체계 내에서는 헌혈 가능 나이 이전에 체계적으로 헌혈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교육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교사의 임의적인 교육이나 적십자사의 이벤트식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을지 모르지만 아주 제한적인 경우에만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헌혈의식에 대한 문제는 다른 헌혈캠페인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문제점입니다.

혈액부족사태의 주원인 단체헌혈 의존율 83%

헌혈 캠페인의 두 번째 방법은 바로 단체 헌혈입니다. 학교, 군부대, 직장, 종교단체 등에서 주로 이루어지는데 다들 한번쯤 단체 헌혈의 경험이 있을 겁니다. 또한 단체 헌혈을 통해 처음 헌혈을 경험해 보신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단체 헌혈이 전체 헌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9년의 경우 83퍼센트였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헌혈캠페인은 단체 헌혈에 크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단체 헌혈은 비중을 떠나서 사람들에게 첫 헌혈에 대한 경험을 주고 이를 통해 이후 헌혈을 할 수 있도록 헌혈에 대한 의식을 심어준다는 의미에서도 아주 중요한 헌혈 캠페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실제 헌혈량을 통해 드러나는 단체헌혈 의존율입니다. 83퍼센트라는 수치는 헌혈 선진국이라고 하는 서구의 몇몇 국가나 이웃나라 일본에 비하면 3배가 넘는 수치라고 합니다.

헌혈 선진국과 헌혈 후진국의 차이는 헌혈량이 아니라 얼마나 1년 내내 안정적으로 필요한 혈액량을 공급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처럼 단체 헌혈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그 단체헌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바로 혈액부족 사태를 유발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여름과 겨울에 항상 혈액 부족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학교가 방학에 들어가기 때문에 학교 단체 헌혈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여름에는 직장인들마저 휴가니 해서 단체헌혈을 기피한다고 합니다. 최근엔 설상가상으로 여름과 겨울에 단체헌혈이 전적으로 의존하는 군부대마저 헌혈을 하기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바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에 불어 닥친 말라리아 때문이었습니다.

말라리아가 어떤 지역에서 발병하면 그 지역에서는 3,4년 동안 채혈을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향후 적어도 2,3년은 매년 여름과 겨울, 이전보다 심한 혈액 부족 현상을 겪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단체헌혈 의존율이 너무 높다 보니 단체헌혈이 안되면 바로 혈액부족 사태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죠. 그리고 이런 현상은 단체 헌혈에 대한 의존율이 줄지 않는 한 계속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기자가 10월 정도에 서울의 한 혈액원을 찾았을 때 여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혈액원은 그날 그날 필요로 하는 혈액을 겨우 맞추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냉동보관할 수 있는 혈장의 경우 사정이 좀 낫다고 해서 보관실을 가 보았더니 그곳마저 재고가 거의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더했고 그나마 10월인데도 사정은 그러했습니다.

당면한 문제 해결에 바쁜 헌혈 캠페인-민방위 헌혈

그러다 보니 단체헌혈 캠페인은 무리수를 두기도 합니다. 현재 단체 헌혈은 서울과 지방의 각 혈액원 기획팀에서 섭외를 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헌혈 영업 사원이라 불리는 이들은 일년 내내 각종 단체를 방문해서 단체헌혈을 부탁하고 어렵게 어렵게 허락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한 혈액원의 기획팀원은 대충 7,8명. 이들이 대한민국 전체 헌혈량의 대부분을 이끌어 내고 있는 셈이죠. 그런데 필요로 하는 혈액량을 최대한 달성해야 한다는 절대절명 때문에 이들은 약간의 비공식적인 섭외를 합니다. 바로 민방위 헌혈 캠페인입니다.

민방위 헌혈이란 민방위 교육 담당자와 협의를 해서 민방위 교육시 교육생 중 헌혈을 하면 교육시간을 감면해 바로 귀가시키는 방법으로 헌혈을 유도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비군 교육에서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예비군 교육 시간이 줄어 훈련의 강제성 및 강도가 강화되면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민방위 교육은 예비군 교육에 비해 약간은 융통성이 있고 허술하기 때문에 아직은 가능합니다. 물론 매년 연초에 적십자사나 각 혈액원은 내무부나 각 시청에 협조공문을 발송해 민방위 교육생의 헌혈 참여를 의뢰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교육시간 감면에 관한 내용은 절대 없습니다. 그냥 비공식적으로 교육시간을 감면해 주는 거죠. 사실 그런 교육시간 감면이 없으면 헌혈에 대한 동참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서울의 한 혈액원 기획팀 관계자는 본 기자에게 솔직히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교육시간 감면을 해준다는 것이 외부로 알려지면 각 구청의 민방위 관계자는 감사를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예 단체 헌혈 섭외를 들어가지 못하는 구청도 있다고 합니다. 민방위 관계자가 당연히 싫어하니까요? 그리고 그런 반대 급부가 없으면 우리 국민들의 정서상 헌혈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가피해서 민방위 헌혈을 하는 것이며, 절박해서 교육시간 감면을 비공식적으로 해준다는 식의 답면이었습니다.

한때는 민방위 헌혈의 문제점을 언론들이 제기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요는 교육소홀이라는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더욱 더 조심해서 민방위 헌혈이 이루어지고 있고, 아예 많이 힘들어 졌다고 기획팀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문제가 많은 민방위 헌혈을 계속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자의 이런 질문에 기획팀 관계자는 '그래도 가두헌혈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간단한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그만둘 수 없는 이유는 그만큼 반응도 좋고 쉽게 많은 사람들을 헌혈에 동참시킬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약간 문제 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 시점에서 궁금했던 것은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과연 자라나는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헌혈교육에 어느 정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안된다 - 헌혈 기념품과 헌혈 캠페인의 이벤트화

다음으로 헌혈 캠페인의 방법상 큰 줄기는 각종 헌혈 이벤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모든 헌혈에는 반대 급부가 있습니다. 먼저 헌혈을 한 사람은 헌혈증을 받게 되고 그 헌혈증은 이후 헌혈자가 자신이 헌혈한 만큼 무료로 수혈을 받을 수 있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헌혈자에게는 헌혈시 현장에서 헌혈 기념품이 주어집니다.

기자가 현장에서 여러 혈액원 관계자들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이런 헌혈 기념품이 우리의 헌혈캠페인에 상당한 기여를 해 왔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이 기념품을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노골적으로 헌헐을 못하겠다고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가두 헌혈의 경우 헌혈차 문 앞에서 고개만 들여 밀고 '뭐 주나요?'라고 질문을 하고 그게 없으면 그냥 사람들이 가 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시대에 따라 헌혈 기념품도 일반인들의 취향에 맞게 바꿔 가야 한다고 합니다. 각 혈액원은 정기적으로 헌혈자들의 기념품에 대한 선호도 조사를 해서 이후 기념품 선정에 반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한 적십자사는 헌혈자에게 일정 금액에 준하는 기념품을 규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 금액 안에서 예전에는 각 혈액원에서 별도 구매를 해왔고 최근에는 적십자사에서 통합 구매를 해서 각 혈액원에 공급해 준다고 합니다. 헌혈자들이 헌혈 후 받는 기념품을 보면 그 금액이 약간씩은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만원이 넘어 보이기도 하고 어떤 것은 그 아래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이건 혈액원이 납품업체로부터 특판가로 구매를 해서 그렇지 금액은 거의 일정합니다.

그러나 적십자사의, 정확히 혈액사업의 엄청난 예산이 이 기념품에 배정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기념품이 헌혈유도에 엄청난 역할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념품이란 게 갈수록 평범한 것이거나 가격이 싼 것에 대한 반응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바로 기념품을 통한 헌혈유도가 어떤 부작용을 가져 올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까지 헌혈캠페인에 동원된 기념품의 종류만도 수백가지가 됩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취향도 변했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바뀐 탓도 있습니다. 기업체의 경품행사를 보면 한때는 텔레비전만 주어도 대단한 것이었는데 요즘은 자동차나 노트북은 기본이고 아파트가 등장하고 심지어 억대의 현금이 등장하는 등 상상을 초월합니다.

헌혈 기념품의 처지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헌혈증에 볼펜 하나 정도면 충분했는데 요즘은 그런 시시한 볼펜은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볼펜은 주변에 늘려 있으니까요? 그래서 등장한 것들이 환금성이 있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전화카드, 놀이공원 무료입장권 등은 그 자체로 이미 현금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헌혈 기념품이라고 합니다.

이런 기념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최근에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는 것이 헌혈 이벤트입니다. 예를 들면 극장 앞 가두헌혈에서는 영화표를 주고 야구장 앞에서는 야구장 티켓을 주는 식의 한시적인 헌혈캠페인의 방법들입니다. 이런 경우 티켓들은 관계 단체나 기업에서 협찬 개념으로 공식적인 헌혈기념품에 원래 산정되어 있는 금액 정도로 공급을 해 준다고 합니다.

적십자사 입장에서는 헌혈을 독려하고 기업체와 관계 단체의 입장에서는 헌혈이라는 아주 의미있는 행사로 자신들을 홍보하는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한시적으로 진행된 헌혈 이벤트는 아주 다양합니다. 예를 들면 대학로 가두헌혈에서는 한때 헌혈자에게 인근 스파게티전문점의 무료 식사권을 주기도 했고, 심지어 결혼정보회사와 적십자사가 주최한 행사로는 '헌혈 미팅'도 있었습니다. 96년에 그런 행사가 있었지만 그보다 2년 전에 있었던 한 행사가 아주 화제거리였습니다. 현재로서 가장 이색적인 행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모호텔도 이 행사에 협조를 했는데 행사의 형태는 이런 식입니다.

결혼 정보 회사는 헌혈 미팅 신청자를 받고, 호텔은 발렌타인 데이를 기념하는 사랑의 헌혈 파티를 제공하고 적십자사는 당일 현장에서 가서 미팅을 하는 커플들로부터 헌혈을 받았습니다. 행사 프로모션은 헌혈을 하면 '미팅권'을 준다는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행사는 아주 성공적이어서 이후 비정기적으로 계속 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자가 느끼는 것은 이런 행사가 헌혈을 독려하는 것인지 아니면 미팅을 독려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행사 참여 기관들은 서로에게 이익이 있다고 계산을 했을 테니 행사가 성사되었지만 그날 헌혈을 한 사람들의 헌혈에 대한 의식 수준은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 이후 헌혈에 꾸준히 동참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는 미지수입니다. 야구장이니 극장이니 이런 행사를 기획한 서울의 한 혈액원 기획팀원은 '기왕 지급되는 헌혈 기념품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야구장 티켓으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영화표를 주게 되면 그보다 더 시민과 함께 하는 더 좋은 헌혈캠페인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기획의도를 밝혔습니다.

새로운 시도는 좋지만 그리고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문제는 여전히 헌혈의식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는 캠페인의 형태와는 거리와 멀고, 당장에 필요로 하는 혈액량을 채우는 헌혈 캠페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행사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야구장 헌혈 이벤트를 보면 그 부작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야구장 헌혈 이벤트도 아무 때나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급적이면 빅게임이어야 잘 된다고 합니다. 왜냐면 야구장 티켓을 공짜로 나눠준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티켓 박스에서 돈을 주고 표를 살 수 있으면 거의 헌혈에 동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좌석이 전부 매진되고 나서야 헌혈에 대한 반응이 생깁니다.

기자가 눈으로 목격한 경우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작년 시즌 마지막 경기에 그날 한 선수의 홈런 기록 때문에 대구시민운동장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평소보다 2, 3배에 가까운 관객들이 몰렸습니다. 그곳 한쪽에는 헌혈을 하면 야구장 티켓을 나눠준다는 플래카드를 붙인 헌혈차가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가 매진 되기 전에는 헌혈자 수가 가두 헌혈차와 수준이 비슷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경기장 밖 안내 전광판에 좌석매진이라는 안내가 나오자마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헌혈차로 몰려 들었습니다. 헌혈차 안은 돌아설 수 없을 정도의 헌혈자들로 붐볐고 차문 밖으로 기다란 헌혈희망자 줄이 생겼습니다. 다들 헌혈캠페인을 눈여겨 보고 있다가 좌석매진이 되면 바로 저기로 달려가야지라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나마 여기까지는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헌혈 캠페인에서 준비하고 있던 티켓이 다 나가고 나자 그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몇 명을 남겨 두고 서로 헌혈을 하려는 사람들간에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원인은 어떤 사람은 밖에 서서 헌혈신청서를 먼저 기재해서 안에 가져다 준 경우와 줄을 계속 지켜가며 헌혈 차례를 기다렸지만 정작 신청서를 다 기재하지 못한 경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를 먼저 헌혈에 참여시켜야 할까요? 이것이 제대로 된 고민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고민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가 티켓을 받아야 하나 하는 문제는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헌혈접수를 받던 혈액원 간호사의 고민도 나중에는 누구의 헌혈을 받아 주어야 할까가 아니라 누구에게 티켓 받을 기회를 주어야 할까로 바뀌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이날 문제는 혈액권 관계자가 구장 관계자에게 부탁을 해서 티켓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표없이 구장에 들여보내주는 것으로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숭고한 헌혈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이벤트의 효과는 그때뿐이고 헌혈 참여자들의 지속적인 헌혈 유도라는 헌혈캠페인의 원래 취지는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헌혈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헌혈보다는 반대급부인 티켓이나 미팅 같은 것에 더 강한 집착으로 자리 잡게 되는 이런 이벤트가 얼마나 헌혈에 대한 인식을 바꿔 줄 수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문제는 우리들의 헌혈과 반대급부를 동시에 생각하는 의식의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를 방치한 채 당장에 필요로 하는 혈액량을 채우는 헌혈캠페인의 현주소입니다. 헌혈 선진국에서는 다른 반대급부는 둘째치고, 헌혈증 즉 혈액예치제라는 반대급부조차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애초에 헌혈은 나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남을 위해 하는 것이라는 식으로 헌혈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의식을 보편화시키기 위해 헌혈 현장에서의 헌혈 캠페인보다는 헌혈이 가능한 나이가 되기 전에 아예 헌혈에 대한 교육과 캠페인을 진행시키는 것에 더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그들과 우리나라 현실의 차이가 잘 말해주고 있는 셈이고요.

<기사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하단의 '이어쓰기'를 눌러주십시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http://myhome.shinbiro.com/~fhuco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의 드가가 제공합니다. '드가(박성호)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방문하시면 다큐멘터리에 관한 풍부한 정보들을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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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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