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거듭하는 국보법 개정
차라리 의원들 소신에 맡기자

이러다가 김대중 정부 임기내에 개정조차 못한다

등록 2000.12.01 17:08수정 2000.12.02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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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개정 작업이 여전히 표류를 거듭하고 있다.

당초 국보법의 연내 개정 방침을 밝혔던 민주당은 그 시기의 연기를 검토하고 있다 한다. 이번 정기국회를 민생국회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국보법 개정문제는 유예할 수 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1일 시민단체 대표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관계의 이중성이라는 구도가 남아 있는 한 명칭이야 어떻든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킬 필요가 있다"면서 "이같은 입장을 수구적,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국회에 제출된 국가보안법 폐지안에 한나라당 소속 몇 의원들이 참여했을때 보여준 당 지도부의 강경한 태도에서 나타나듯이, 국보법 개폐에 대한 한나라당의 입장이 더욱 부정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자칫하면 국보법 개정 작업이 다시 내년으로 넘어갈 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어디 내년이라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겠는가. 한나라당과 자민련은 국보법 개정에 대해 변함없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일 것이고, 집권세력 또한 다른 현안들을 수습하는데 정신이 없어 국보법 개정에 힘을 쏟을 여건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러다가 김대중 정부 임기내에 국보법 개정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채, 혹여라도 다음 정부에 가서 국보법이 다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냉전과 권위주의 시대가 남긴 대표적 유산이라 할 수 있는 국보법, 이제는 탈냉전의 시대가 열렸고 여야간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는 마당에 이것 하나 바로 잡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국보법 개정 작업의 표류는 김대중 정부 개혁작업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국보법 개정을 약속했던 정부가 들어선지 벌써 몇 년째인데,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 어디 국보법 하나 고치지 못하고 있는 무능력한 집권세력만 부끄러울 일인가. 세상이 다 변하고 있는데도, 나 몰라라 하고 죽으나 사나 냉전과 대결만을 외치고 있는 '원내 제1당'의 모습이 부끄럽고, 명색이 민주화운동 출신들이 수십명도 넘게 금뱃지를 달고 있어도 국보법 개정에 제대로 된 목소리 하나 내지못하고 있는 모습이 또한 부끄럽다.


그러나 부끄러워만 하고 있을 때는 아니다. 이제는 국보법을 고칠 것인지 말 것인지 결론을 내자. 그리고 각자의 입장을 분명히 하자. 눈치보기로 일관하고 시류에 따라 이리저리 태도를 바꾸고 있을 때는 지났다.

나는 우선 각 정당과 소속 의원들이 국보법 개폐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야 각 정당은 국보법 개폐에 대한 당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공론화하여 결정하고, 의원들 또한 그 과정에서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아울러 두가지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국보법 개정은 가급적 여야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지금의 정치상황이다. 비록 불만족스럽더라도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최대 공약수, 그러니까 인권침해를 가져온 독소조항들을 찾아 그에 대한 개정을 우선하고, 나머지 부분들을 추후에 손댈 것을 기약하는 방식이다. 여야가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여야합의로 국보법을 개정하는 것이 일단은 가장 현실적이고 소망스러운 상황이다.

둘째, 그러나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최소한의 개정에도 완강히 반대하여 개정안의 국회통과가 사실상 불가능해질 경우, 차라리 자유투표제의 도입을 통해 의원 각자의 소신에 맡기는 방식이다. 물론 이 경우 자유투표는 야당 뿐 아니라 여당에도 해당되기 때문에 국보법 개정안이 표결로 부결될 가능성도 커진다. 단, 이 경우 전자투표 방식 등을 통해 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가가 공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두 가지 방안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치가 없다고 본다. 개정안조차 상정하지 못한 채 김대중 정부 임기내에 국보법 개정이 무산되는 상황보다는 차라리 의원 각자의 소신과 판단에 맡기고 그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국보법 개폐문제는 정파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나 이미 이 문제는 정파적 다툼의 한복판에 들어온지 오래이다. 김대중 정부를 반대한다면 국보법 개폐에도 무조건 반대하고 보려는 것이 현실이다. 정말 답답한 노릇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시민운동을 비롯하여 지식인사회 등 여론주도층의 책임도 크다. 정파적 다툼 속에서 국보법 개정이 표류하고 있던 그간의 과정에서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은 모아지거나 들리지 않았다. 이제라도 다시 뜻을 모아 국보법 개폐를 향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가야 할 때이다. 시간이 더 지나면 국보법 개정은 물건너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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