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통령이 민심을 수습하는 길

여당 총재직을 떠나 대의명분의 길을 가야

등록 2000.12.04 18:09수정 2000.12.05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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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대통령의 국정쇄신책이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심사숙고를 거쳐 연말 이전에 제시될 것이라 한다. 국정위기와 민심이반 현상에 대한 수습의 필요성이 진작부터 제기되어온 점을 감안하면 그렇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즉흥적인 일회성 대책이 아닌 근본적인 국정쇄신책이 제시될 수만 있다면 조금은 더 참고 기다릴 용의가 있다.

이제 문제는 김 대통령이 내놓을 국정쇄신책이 과연 어느 수준의 것이 될 것이냐에 달려있다. 그동안 집권 민주당내에서는 전면적인 당정개편을 통한 민심수습안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작금의 위기의 본질을 돌아보면 과연 집권당의 당정개편이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민심수습안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설혹 집권당 대표를 다른 얼굴로 바꾸고 당 3역도 바꾸고, 경우에 따라 장관 몇 사람 바꾸는, 대통령으로서는 나름대로의 결단을 내린다고 해도, 등돌린 국민들의 마음을 다시 붙잡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진 현정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김 대통령에 대한 실망은 대증요법(對症療法)을 넘어 환부를 도려내는 대수술을 요구하고 있다.

작금의 위기가 갖는 본질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자칫 민심을 수습하기는 고사하고 민심을 악화시키는, 변죽만 울리는 수습책이 나올 위험도 있다. 집권당의 지도부가 민심과는 동떨어진 방향으로 무리하게 당을 운명한다든가, 집권당 대표가 제 역할을 못한다든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 가운데 겉으로 드러난 아주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할 지 모른다. 집권세력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대수술이 따르지 않는한, 당 지도부가 바뀌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앉는다 해도 이름이 바뀌는 것 이상의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은 죄없이 고통받는 국민에 대한 안타까움을 목이 메여 표현하며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국민의 정부' 아래에서도 국민들의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듯이, 오히려 더큰 박탈감과 좌절감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 대통령은 국민앞에서 언제나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옳음을 말하였다. 야당에 대해 현집권세력의 도덕적 우위를 말하였고,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였으며, 지역감정의 추방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야당을 상대로 한 정국은 하루도 안정된 날이 없었고, 구조조정으로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댈 곳은 없었다. 그런가 하면 지역편중인사 시비속에서 지역감정은 더욱 심화되어갔다. 대통령의 말이 옳았든 아니었든간에, 그것이 현실이었다.


이 현실을 두고 야당의 탓을 하고 국민을 원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치력을 발휘하여 야당을 다독이며 파트너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 구조조정으로 고통받는 중산층과 서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 못한 것, 특정 지역 사람들만 출세하는 정권이라는 시선을 털어버리지 못한 것.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집권세력, 아니 김 대통령이 져야하는 책임이었다. 그게 왜 내 탓이냐는 억울한 생각이 든다 해도, 그 모든 책임을 기꺼이 져야하는 것이 집권자의 도리이며 책임이다.

상황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야당과 함께 안정적인 정국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야당과의 관계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정권교체의 칼을 갈고 있는 야당이 집권세력의 희망사항을 그리 호락호락하게 들어줄 것같지는 않다.


구조조정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해서는, '고통도 희망도 공유하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종 제도의 개혁이 필수적이지만, 현집권세력이 기득권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러한 개혁을 추진하기에는 이제 힘이 부치는 것으로 보인다.

특정 지역 정권이라는 인상을 불식하기 위해서는 전근대적인 지연(地緣)으로 얽힌 정권 인맥의 과감한 교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뜩이나 불안정해지는 정권이 자신의 핵심적 기반을 과감히 변화시키는 용기를 갖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다. 모든 문제들이 원칙적인 방향과 현실적인 정치논리간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어려울 때일 수록 정도를 걸으라고 했다.

나는 김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에서 사퇴하고 오직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에 전념하는 선택에, 오늘의 난국을 풀어갈 마지막 열쇠가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정치 9단'의 대통령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정치적으로 고려되고 판단되는 가운데, 수구도 아니고 개혁도 아닌 국정의 혼돈상황은 지속되었다.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 자민련과의 공조에 쏟은 노력의 절반만이라도 개혁에 쏟아부었다면, 그래도 김 대통령은 대의와 명분을 갖고 국민의 협력을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정치 9단 대통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김 대통령은 모든 사안들을 정치적으로 판단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정치 9단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그의 발걸음을 막는 족쇄로 자리하고 있다.

김 대통령이 여당의 총재로서 정파적 이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는한, 그리고 여당의 재집권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한, 위기의 수렁에서 스스로를 구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제 민주당 총재직 사퇴를 통해 여당 총재로서의 위치를 떠나, 오직 국가적 위기를 수습하는 대통령으로서의 길을 가는 것이야말로 근본적 국정쇄신을 위한 대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위기극복과 민심수습을 위한 필요조건에 불과할 지 모른다. 그 자체만으로 오늘의 어려움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 자신이 정치적 기득권에 집착하지 않고 사심없는 자세를 보여줄 때, 지금 허물어져있는 대통령과 국민간의 신뢰가 다시 구축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김 대통령에게는 개혁을 추진할 힘도, 위기를 수습할 힘도 없어져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표한다. 김 대통령 스스로가 한 정파의 수장으로서의 위치를 고집하는한, 그에게 위기를 극복해나갈 새로운 힘이 실리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가 이 위기를 극복할 힘을 되찾는 길은 대의와 명분에 충실한 선택을 하는 것밖에는 없다.

대통령 개인의 능력이나 힘으로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는 없다.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현집권세력이 가는 길이 바른 길이라는 국민적 공감대위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권세력이 과감한 자기희생을 통해서라도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김 대통령이 여당 총재직을 떠날 경우 어찌 여당에게 부담이 되지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히 많은 것이 불안할 것이다. 야당에게 그냥 정권을 안겨주는 결과를 낳을지 모른다는 우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이 걱정된다고 부모가 언제까지 끼고 살 수는 없지않은가. 여당의 안정과 재집권을 걱정하기에 앞서, 국가의 위기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것이 지금 김 대통령이 취할 대국적 자세이다. 어쩌면 지금의 민주당도 그러한 시련을 이겨내며 국민속의 강한 정당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을지 모르는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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