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집권목표와 공작적 사고

한나라당 '대권 문건' 속의 부조화

등록 2000.12.13 14:31수정 2001.01.15 17:40
0
원고료로 응원
한나라당의 '대권 문건' 파문이 계속되고 있다.

적대적 언론인에 대한 비리 자료축적 등의 내용을 담은 '대권 문건'이 공개되어 파문을 일으키자 13일 이회창 총재는 유감을 표명하고 작성자에 대한 문책방침을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진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파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관련기사
1>언론인 공작 문건' 전문을 직접 한번 보시겠습니까?-공희정 기자


2>'한나라당 대권 문건' 작성자 인터뷰 "단지 습작일 뿐이다"-공희정 기자

한나라당은 이 문서가 기획위원회 소속 한 당직자의 개인적인 습작일 뿐, 이회창 총재는 물론 맹형규 기획위원장에게조차 보고된 적이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들이 남고 있다.

우선 문건이 정식 보고의 형식과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건의 표지 상단에는 <별첨>이라는 표기가 명기되어 있다. 이는 본(本)보고서는 따로 있고, 이 문건은 그와 함께 제출된 별첨자료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보고서의 제목, 부제, 작성 월(月), 기획위원회라는 작성 주체가 명기되어 있는 상태로 보아, 일단 최종적인 검토를 끝내고 보고용으로 정리된 문서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같은 의문은 더욱 커진다. '10대 핵심과제'라 이름 붙여져 있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이회창 총재가 대권으로 가기 위해 챙겨야 할 항목들을 열거해 놓은 것이다. 각 분야에 걸쳐 상당히 정선되어 있다는 판단이 든다.


내용의 수준과 상관없이, 상당한 시간과 정성이 소요되는 작업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보고조차 되지 않을 개인의 습작을 만드는데 이 정도의 공을 들인다는 것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보고서 전문을 보고난 느낌은 개인적인 습작에 불과하다는 한나라당의 해명과는 달리, 형식과 내용, 표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보고를 의식하고 만들어진 문건이라는 것이었다. 아마 정당의 보고서를 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슷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문건이 이회창 총재에게 보고되었느냐 여부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 총재에게 이 문건이 보고되었다는 것과, 이 총재가 그 내용에 동의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혹 이 총재에게 보고되었다 해도, 이 총재가 그 수많은 보고서 가운데 <별첨> 자료의 세세한 내용까지 기억했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이 문건이 이 총재에게 보고되었느냐 여부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여겨진다.


정작 내가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이 문건에 담겨있는 사고(思考)에 관한 것이다. 사실 정치권에서 이런 문건의 작성이 새삼스러운 일은 전혀 아니다. 원내 제1당의 총재이자 차기 대권의 유력한 인물인 이회창 총재를 위해 당내에서 대선전략 보고서가 작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내 비주류에서는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를 이 총재로 기정사실화한 보고서 작성 자체를 사당화(私黨化)의 증거라며 비판하고 있지만, 그것도 현실이라고 여기서는 일단 덮어두자.

문제는 개인이 작성했든 조직적으로 작성했든, 당조직의 이름으로 작성된 보고서에 담겨있는 사고가 너무도 구태의연하다는 사실이다. '적대적 집필진 비리 등 문제점 자료축적' 제안이 갖는 공작적 발상은 두말할 것도 없고, 'JP와의 관계개선' 건의가 갖는 정략적 발상도 정치발전을 생각하는 정당의 자세와는 거리가 멀다. '여권 핵심부의 비리관련 자료 축적', 'DJ추진 대북정책 문제점 파악', 'DJ정권하에서 피해입은 불만세력의 조직적·전략적 활용방안'같은 내용들도 네거티브 전략의 전형들이다.

물론 공작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같은 대선보고서들은 1987년에도, 1992년에도, 1997년에도 수없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적대적인 언론인의 비리 자료축적이라는 부분이 문제가 되어 불거지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같은 기조의 내용들은 정치권에서는 사실 과거에도 많이 작성하고 보고받고 해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갈 일은 아니다. 이제는 세기도 바뀌었지 않은가. 2002년에 치러질 대통령선거를 대비한다는 보고서가 과거의 사고로부터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한 것인지, 답답한 노릇이다. 이번 문건에 담겨있는 공작적 발상, 정략적 발상, 네거티브한 전략들, 이 모든 것들이야말로 20세기 낡은 정치의 상징이자 유산이 아니던가.

내가 이번 문건 파문을 보며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2002년의 집권을 향해 뛰고 있는 야당총재를 위해 작성된 문건이 너무도 구태의연하고 진부한 사고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디 작성자 개인이나 부서의 책임이겠는가. 지금 야당내에서 통용되는 '대권전략'의 사고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구시대적 사고가 선거를 주도하게 될 때, 그렇게 탄생된 정권이 결국 그 물에서 노는 것은 숙명과도 같은 일이다.

야당이 목표로 하고 있는 정권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현정권에게 실망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정권이 바뀌면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감 내지는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번 문건을 보고 누가 과연 그같은 기대감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다시 바뀌어봤자 결국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는 실망만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YS가 정권을 잡아도, DJ가 정권을 잡아도 결국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는 좌절감이 팽배해있는 우리에게, 다시 정권이 바뀌어봐야 공작정치, 정략정치는 변함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이번 문건 파문은 안겨주고 있는 셈이다. 야당을 향한 현정권의 표적사정을 그토록 비판했던 야당에서, 다시 비판자들의 비리를 수집하여 활용하자는 공작적 제안을 하는 모습을 보는 우리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이제는 정말 새로운 정치를 보고 싶다. 비판자들의 비리를 캐고 상대를 죽이는 대책이 정당내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선전략으로 대접받는 풍토가 사라지고, 자신들이 더 나은 점을 설득력있게 증명하는 노력이 기울여지는 새로운 풍토가 열리기를 바란다. 한나라당의 '대권 문건' 파문이 여야 모두에게 이런 생각을 한번쯤 하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염불에 불과할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X은 저거가 싸고 거제 보고 치우라?" 쓰레기 천지 앞 주민들 울분
  3. 3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지금도 소름... 설악산에 밤새 머문 그가 목격한 것
  4. 4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5. 5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검찰 유도신문' 녹음 파일 통했나... "최재영 청탁금지법 기소" 결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