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바람속에서도 청산녹죽과 까치밥이 있어 좋습니다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다녀와서

등록 2000.12.31 01:56수정 2001.01.0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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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오후, 2000년의 마지막 하루를 남겨놓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행할 곳을 찾다가 이웃 동네 해남의 김남주 시인의 생가를 다녀왔습니다.

김 시인의 생가는 이번까지 모두 다섯 번째인 듯 합니다. 지난 3, 4년 동안 한해에 한번씩은 답사객들의 안내를 위해서든 마음이 답답해서든 찾았으니까요.

김 시인의 생가는 남도의 끝 해남에 있습니다. 해남읍에 있는 고도삼거리에서 완도방면으로 4km정도를 가다보면 길 건너편으로 제일기사식당이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입니다. 그 고개마루 오른편에 골프연습장의 파란 그물이 보이고 '봉학리'라는 자그마한 이정표가 있고 그곳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다시 500m 정도 콘크리트 포장길을 더 가면 봉학리 마을 회관이 나옵니다.

회관 뒤로 주홍색의 문간채 지붕이 보이고 그 아래 푸른색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시인의 생가임을 알리는 것 말고는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2000년 12월 30일 오후 3시 30분 봉학마을도, 시인의 집도 너무나 조용했습니다. 회관앞 수렁논에 오리와 똥개들이 없었다면 호환이나 돌림병에 사람들이 소개된 빈마을로 알았을 것입니다. 날씨는 계절답지않게 화창한데 마을은 차라리 심해나 끝간 데 없는 동굴의 적요라고 할까요.

먼저 시인의 생가 안채는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안채와 문간채의 처마에 걸려 있던 시인의 시화는 오간데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을 때 찾아도 시인의 집임을 알리는 유일한 흔적이었는데.

온갖 들꽃이 만발했던 화단에는 분재용으로 기를 동백나무 여나무 그루가 허리가 베인 채 심겨져 거적과 비닐에 싸여 있고 농사와 김장끝의 쓰레기가 마당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허물어져가는 담장에 노랑색와 연분홍색의 깃발이 세워져 있길래 펼쳐 봤습니다.

'농가부채 특별법 제정', '농산물 가격 보장'풍로와 세끼 꼬는 기계가 모진 풍파에 썩어가는 곳에 반쯤 열린 문간채 방문을 열어 봤습니다. 거기 새로 사다놓은 낫과 가래가 한자루씩 있더군요. 대문을 나서는데 한켠에 하얀 일회용 기저귀 서너 개가 성경이 세겨진 액자 위에 놓여있어 그래도 허전한 마음을 달랠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시린 바람이 불어옵니다. 가슴에 꽂히는 청산녹죽 푸른대가 뒤울에서 사각거립니다. 울밖 유자나무는 까치밥인양 유자 두개를 딸랑거립니다.
시뻘건 황토밭에서는 퍼렇게 마늘이 알을 키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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