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둥이의 언땅에도 봄은 다시 온다

2001년....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등록 2001.01.01 00:00수정 2001.01.0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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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녘의 벼 밑둥이는 하얀 서리를 덮어썼습니다. 자세히 보니 불쑥불쑥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인간군상처럼 보입니다. 어떤 녀석은 꼿꼿한데, 또 어떤 녀석은 쓰러져 있고...
ⓒ 오마이뉴스 노순택


휘이-이잉... 휘잉
밖은 온통 동(冬)장군이 호령하는 매운 바람입니다.

간밤... 잘 주무셨는지요.
지난 세기에 만나고, 또 만나니 이거... '세기를 뛰어넘는 만남'이 아닐 수 없네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그리니치 천문대가 '공식' 인정하는 '21세기'입니다.
간밤에 가족과 또는 연인과 함께 한 지난 해의 반성은 '세기의 반성'이요, 새로운 다짐은 '세기의 다짐'이 되니, 참으로 거창하기 이를 데 없군요.

오늘 같은 날,
무거운 구들장 지고 아랫목 싸움만 하기보다는 밖으로 나가보세요.
가까운 곳에 들판이 있다면 그곳으로, 아니면 동네 야트막한 산이라도 올라보는 건 어떨까 싶어요.

21세기의 인류가 짊어져야 할 화두(話頭)가 '지속가능한 발전'임을 감안해 본다면, 자연과 벗하는 출발은 틀림없이 의미로울 수밖에 없을 겁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제가...
먼저 나가보았습니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도 채 안되는 여기 김포 들판에는 지난 여름과 가을을 살뜰하게 보낸 겨울 들판이 나른한 휴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농군의 진한 땀방울이 흥건했던 들녘은 늦가을에 '불바다'가 되었다가, 지금은 타고남은 벼의 밑둥과 그 위로 하얀 옷을 덮어준 서리가 무성하네요.

자세히 살펴보니 어떤 녀석은 움추려 있고, 어떤 녀석은 매무새도 당당, 또 다른 녀석은 아예 쓰러져 있습니다. 길게 늘어선 군상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떠오르는 건 왠일인지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들길 따라 올라간 둔덕에는 막 떠오른 아침해가 억새를 비추고 있습니다. 지난 크리스마스를 하얗게 밝혔던 눈은 아직도 녹지 않았네요.

소나무엔 눈꽃이 피어있고, 작은 돌멩이는 눈 사이를 비집고 햇살을 맞습니다. 더 오르다 이름 모를 작은 열매도 만났지요.

ⓒ 오마이뉴스 노순택
이쯤 오르면 손도 시렵고 발도 오무라들기 마련,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있을 걸'하고 괜한 후회가 밀려오기 쉽상입니다.

허나 자연의 이치가 그렇고, 사람 사는 이치가 그러하듯 이 '고비'만 넘으면 됩니다. K2를 등반하는 게 아닌 바에야 꼭대기가 곧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고, 이때부터 등짝에 송글송글 땀이 차오릅니다. 그럼 오르기가 한결 편하지요.

이제 꼭대기.
특별난 풍광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련만, 기분만은 상쾌합니다. 가족과 함께 올랐다면 벌겋게 달아오른 서로의 얼굴을 보며 새해 다짐... 이거 빼놓고 내려오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새해 첫 날 아침,
코흘리개 시절의 감수성이 그대로 묻어난 아름다운 시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드는 심호택 시인의 '그 아궁이의 불빛'이라는 시를 들려드릴까 합니다.

아무쪼록 아궁이의 불빛처럼 따뜻하고 밝은 한 해, 맞으시길 빕니다.

그 아궁이의 불빛

달아오른 알몸처럼
거룩한 노래처럼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푸른 안개자락 끌어덮은 간사짓벌
갈아엎은 논밭의 침묵 사이로
ⓒ 오마이뉴스 노순택
도랑물 하나 어깨를 추스르며 달아나고
기러기떼 왁자지껄 흘러갔다
목도리 칭칭 동여맨 아이들
저녁연기 오르는 집에 어서 가자고
재잘거리며 흩어진 학교길
진창에 엉긴 서릿발이
저문 달구지 바퀴에 강정처럼 부서질 때

짚검불이 숨죽이며 타오르는 부엌
불길의 혀에 가쁜 부뚜막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것 까마득히 모르는
멸치들이 시레기를 뒤집어쓰고 끓었다
토장국 냄새 맡으며
온동네 한바퀴 쏘다닌 바람
춥다 춥다 사립문을 걸고넘어질 때

너도 들어와 불 쬐고 가거라
홍시를 머금은 듯
활개치며 달아오르던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 오마이뉴스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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