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후 6시 청주시 내덕동 한 술집.
어제의 태양과 오늘, 내일의 태양이 틀릴 리 없는데도 새해 해돋이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들뜬 모습을 보이고 방송에서도 연일 새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정모 씨(45)는 못내 부러우면서도 화가 치밀어 소주잔을 연신 기울인다.
"걱정입니다. 따지고 보면 제 잘못이지만 그 이전 무분별하게 신용카드를 발급한 카드회사에 책임을 떠넘기기라도 해야지 마음이 조금 가라앉네요.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일거리마저 떨어져 솔직히 올 1월이 고비인데 뚜렷한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정 씨가 소지하고 있는 신용카드는 모두 13매. 정 씨가 이토록 많은 신용카드를 갖게 된 것은 지난 97년 초 음식점을 개업하면서부터다.
그 이전 단 한개의 신용카드도 없었는데 거래 은행이 생기며 그곳 직원의 권유 및 카드 회사 영업사원들이 음식 한번 먹으러 왔다 카드 발급을 부탁하면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하나씩 만들다 보니 현재에 이른 것이다.
청주시 내덕동에 위치한 식당은 그러나 곧 IMF가 몰아친 데다 상권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됐을 뿐 아니라 특별메뉴가 없는 평범한 식단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만 했다.
더구나 무리하게 인수한 식당은 폐업 당시 권리금 4000만원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을 포함, 총 2억여원의 부채만 안겨줘 살고 있던 집마저 잃은 채 지난해 여름부터는 나이 든 부모님 집으로 들어오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금융권으로부터 신용불량자가 되지는 않았지만 98년부터 소득이 없게 된 정 씨는 소지하고 있던 카드 신용대출과 물품 구입을 통해 가정살림과 은행 대출 이자를 메꿔 나갔으며, 현재 대학 1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인 자녀의 등록금 및 컴퓨터 등 자녀 교육에 사용했다.
"계산하기도 겁이 나 정확한 카드 대금을 알 수는 없지만 약 3000만원 선에 이르는 것으로 짐작할 뿐입니다. 그 동안은 살얼음을 걷는 심정으로 카드 대금 날짜를 잘 지켜와 탈이 안났는데 지난 연말 기어코 카드 2개가 펑크나며 나머지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이러다보니 애꿎은 술만 먹게 되네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정 씨는 카드 사용 이외에 틈틈이 레스토랑이나 대형 술집 실내 인테리어 등을 맡아 어느 정도 비정기적이나마 소득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난해 11월 이후 완전히 일거리가 사라져 이제 카드 대금에 좇겨 하루하루를 불안과 초조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다가 강도질이라도 할 것 같은 기분입니다."
2일 오전 11시께 대전시 중구에 있는 한 오피스텔 건물 지하 다방.
지난해 말 한 지방일간지의 기자로 있다 퇴직한 서모 씨(35).
"퇴직금이며 밀린 봉급을 계산하니 약 2000만원 정도 되는데 회사에서 아직까지 한푼도 못받았습니다. 집 생활비는 물론 자동차운영비 등 들어가는 돈은 많은데 수입이 없어 속칭 카드깡을 받기 위해 나왔습니다. 기자로 있을 때는 몰랐는데 전직 경험을 살려 갈 수 있는 직장은 아예 없더군요. 언제까지 실직자로 있을지 모르는데 깡을 하는 것이 늪으로 빠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네요."
서 씨가 밝힌 카드깡의 수수료는 100만원의 물품을 구입한 명세표에 사인하면 현장에서 87만원을 건네받는 것. 본인이 필요한 돈의 13%가 수수료로 나가는 엄청난 출혈이 오는 데다 전직에 비춰 불법인 걸 알면서도 불구하고 서 씨는 이같은 일을 감행하려는 것에 대해 담담히 말했다.
"우선 먹고 사는 것이 급한데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네요. 금융권 대출도 직장이 있을 경우 이야기지 떠나니 그림의 떡이구요. 아마도 카드회사 연체가 날로 늘어난다는 것도 이런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암묵적으로 카드회사가 이를 방조하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지금 저의 심정은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입니다. 가장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토록 힘들다는 것을 요즘 들어 더욱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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