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국의 뿌리를 찾아서 - 2

김현종의 <영국 이야기 10>

등록 2001.01.15 13:46수정 2001.01.15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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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유럽의 전통 도시에서 관청과 광장, 시장, 성당은 늘 함께 붙어 다닌다. 성곽 도시로서의 어쩔 수 없는 특징이다. 요즘 식으로 얘기하면 정치(행정),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시내 중심지에 인접해 있고 이를 연결하는 공간이 광장인 셈이다. 이 삼각형의 연결점으로서 어느 도시에나 존재하는 광장에 대해서는 차후 연구를 더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살라망카에는 까테드랄 누에바(새 성당)와 까테드랄 비에하(구 성당)의 두 성당이 있는데 구 성당에 들어가려 하자 마침 성탄절을 맞아 성탄절 준비물을 설치하러 오가던 젊은이가 "이쪽이 입구"라며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감사의 뜻을 표하자 성호를 긋기만 한다. 보통의 스페인 사람들은 이처럼 친절하다. 앞서 레옹에서는 길 가던 신사가 우리에게 숙소를 찾아주겠다며 가던 길을 멈추고 함께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여관을 찾은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일종의 호객꾼인가 의심도 했는데 보통의 선량한 스페인 사람이었다. 그가 안내해준 숙소는 가격이 맞지 않아 그만뒀지만, 기아자동차에서 만든 슈마를 탄다는 이름모를 시뇰(미스터)은 우리 가족에게 스페인의 정을 알게 했다.

까테드랄 비에하는 이번 스페인 방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성당이었다. 동정녀 마리아의 생애를 53개의 벽화로 그려, 높이 15미터, 앞 뒤 길이 50미터, 좌우 넓이 30미터안팎의 성당 내벽에 모셔놓았다. 마리아가 예수를 수태하는 장면은 물론 예수의 탄생에 즈음해 가족들과 이야기하는 장면, 물긷는 장면, 살림하는 장면, 기도한 장면 등이 특히 눈에 띄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예수의 승천 장면이다. 장엄하고 엄숙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 그림들은 플로렌스의 니콜라스라는 화가가 15세기에 그린 그림들로서 선명한 색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세부 묘사는 가히 압권이다.

장엄한 분위기에 반해 있다가 촛불들이 놓여져 있는 예배석 중간쯤에 다리도 쉴 겸 앉으니 저절로 신과 交通(교통)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모두들 머리 숙이고 5분쯤 기도를 올렸다.
이 성당에서 마침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니 시인 김광균의 1920년대 시 한 구절이 생각났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성당의 예배석에 앉아 밖에서 빛이 들어오는 창문을 바라보니 푸른 색 스테인드 글라스가 햇볕을 받아 반짝인다. 싯귀와 현실이 잘 연결돼 여행의 힘듬을 개운하게 씻어줬다. 이번 스페인 여행 중 반한 빛깔이 세 가지인데 바로 이 신비스런 느낌조차 드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푸른빛이 첫째다. 어렸을 적, 교과서치고는 질 좋은, 빠닥빠닥한 아트지에 천연색으로 인쇄된 미술 교과서를 기억하는가. 그 책의 서양 성당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그 푸른빛이다.

푸른 유리, 녹색 올리브, 쪽빛 바다

요즘은 잉크 쓰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예전에 한참 애용하던 모나미 청색잉크 병 빛깔에 明度(명도)와 彩度(채도)를 좀더 강화하고 그 대신 5% 쯤의 녹색을 가미한 뒤 톤(tone)을 약화시킨 빛깔이다. 햇볕을 받으면 투명한 듯 하면서도 자세히 바라보면 불투명해 신비감을 더해준다. 스페인 성당의 청색 스테인드 글라스는 어린 시절 책에서 본 동로마제국 성당의 푸른빛보다 부드럽고 연하다.

둘째는 가도가도 끝없는 녹색. 스페인의 주산물인 올리브 나무에서 많이 보았다. 이 올리브 나무의 녹색은 우리 나라 7,8월의 녹음보다 다소 엷고, 그러면서도 무겁고 탁하게 느껴지는, 그만큼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가오는 빛깔이다. 스페인의 흙빛은 누르튀튀하면서도 때로 고지대에서는 잿빛이 섞여 있는데 이 흙빛과 올리브의 녹색은 절묘하게 배합된다. 멀리서 보면 누른 색의 흙과 다소 가벼우면서도 흐린 녹색의 올리브 나무가 결합돼 농경 사회의 고단함을 읽게 해준다. '가도 가도 황톳길'의 한하운 시인이 소록도 가는 길에 본 황토. 그 황토 빛에서 연상되는 전라도 농촌의 투박하고 서럽고 고단한 정서와 일맥상통한다고 할까.

스페인의 올리브 나무는 이제 경작하기보다 수확이 큰 문제다. 예전 수확하던 사람들의 자식들은 도시로, 남미로, 잘사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다 떠났고, 노인들만 남아 농촌을 지키기는 스페인도 한국과 매한가지이다 (스페인의 농업 인구는 10% 미만이다). 북아프리카에서 건너온, 대체로 밀입국한 흑인 노동자들이 그 사역을 대신한다. 올리브 나무의 녹색을 한참 바라보면 남국의 땡볕에서 땀흘리는 흑인 젊은이의 불끈불끈하는 검은 근육이 보이는 듯했다.


셋째는 쪽빛이라 할까, 스테인드 글라스의 채도 높은 푸른빛과 또 다른, 푸른 스페인의 바다 빛깔이다. 괌이나 사이판 같은 남녘 바다를 직접 본 사람이나 그 여행 안내 책자를 본 사람은 기억하리라. 남쪽 바다의, 물 맑은, 시원한, 투명한, 순수의 녹색을 아버지로 하고 순수의 청색을 어머니로 한 빛깔이다.

평균 고도 400 미터의 나라

내가 본 겨울의 스페인 남단 바다는 이것보다 다소 청색에 가까웠다. 아마 여름과 빛깔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여름에는 괌의 바다 빛깔에 보다 가깝겠지.
사람이 경험으로밖에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나는 이 스페인의 남쪽 바다, 지중해의 꼬리에 해당하는 바다의 겨울빛을 95년에 보았다. 당시 정치부 기자로 지방선거에 승리한 김대중 총재를 취재하기 위해 추석날 제주도에 잠입했는데 (박지원 대변인이 "기자들은 제발 오지 말라"고 여러 차례 공지까지 했는데 무시하고 따라 갔으니 잠입이다) 거기서 서귀포 외돌괴 바다의 쪽빛을 보았다. 10월 제주도의 바닷빛과 12월 스페인 남단 바다의 바다빛은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었다.


다음날 아침 8시까지 늦잠도 자고 아침밥도 천천히 먹고 다음 목적지인 세빌르로 출발했다. 세빌르로 가는 길은 여전히 국도 N-630번으로 해발 600 미터 쯤의 고지대를 오르내리는 코스다. 한국은 평지인 도시와 산림인 시골이 뚜렷이 구분돼 해발 600 미터라면 고지대로 인식되지만 이곳 사람들에게는 중간지대쯤에 해당한다. 지도를 펴놓으면 볼 수 있듯이 스페인, 이베리아 반도는 평균 높이가 400-500 미터 쯤이고 수도인 마드리도도 해발 700 미터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면서도 경사가 완만해 고지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누군가는 인간이 살기에 가장 적절한 높이가 해발 600 미터에서 700 미터 쯤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民選(민선)인 강원도 평창군수는 영동고속도로 평창군 진입 지점에 '쾌적한 평창, 살기 좋은 평창, 클럽 700(700미터 고지대라는 뜻)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취지로 안내판을 적어 놓았던 게 기억난다.

어쨌든 세빌르는 지금껏 얘기한 소도시들과 달리 인구 70만의 스페인 4번째 대도시이다. 유럽에서 인구 70만 도시라면 대체로 한국의 같은 크기 도시보다 면적이 두 배쯤 된다. 고층 건물이 적고 개인당 공간이 다소 넓기 때문이다.

일본 부채를 스페인에서 만나다

세빌르는 또한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카르멘 등의 무대가 된 도시이다. 세빌르에서 인상적인 것은 기랄다(giralda)와 알카자르이다. 기랄다는 옛 무슬림 왕이 여동생에게 선사한 건물을 나중에 통일 스페인의 왕이 개축한 곳이다. 높이 70미터쯤의 꼭대기에는 피뢰침마냥 구리를 오려붙여 만든 것 같은 닭의 머리 형상이 조그맣게 붙어 있다. 서양 건축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이 조형물은 바로 풍향계에 해당한다. 닭 머리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고 바람의 방향을 가늠했던 것이다.

까테드랄과 붙어 있는 알카자르는 세빌르 최고의 건축물이다. 나중에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아 이건 세빌르 알까자라의 확대판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우선 벽면부터 예사롭지 않다. 파랗고 노란 조그만 타일들을 수없이 모자이크한 내벽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아름다운 채색으로 몇백 년 전 무슬림 시대로 돌아가는 느낌을 준다. 중세 무슬림 귀족들이 쓰던 접견실, 침실, 정원 등이 보기 좋게, 살기 좋게 배치돼 있다.

박물관을 겸하고 있는 알카자르에서 나는 세 가지 특징적인 것을 보았다. 첫째는 검은 바탕에 울긋불긋한 무늬로 채색된 부채들. 우리 나라 합죽선이나 태극선보다 올망졸망하고 감각적인, 접는 부위가 더 촘촘한 부채들. 바로 일본 부채다. 부채는 서양에서도 왕궁을 중심으로 사치의 상징으로 한때 유행했다고 한다. 특히 스페인이 그렇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 인들이 일본의 부채를 서양에 퍼뜨렸다.

과거는 이처럼 참으로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나 보다. 이 부채는 16세기 일본에까지 진출한 스페인 신부들과 포르투갈 모험가들에 의해 서양에 전달됐고 두 나라 왕실을 거쳐 온 유럽의 왕실로 퍼졌다. 스페인의 왕들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와 같은 혈통이니 삼촌이 조카딸에게, 고모가 생질에게 동양의 풍물을 소개하는 소도구로 활용되었던 셈이다.

머스켓 소총과 황인종의 악연

부채 대신 서양인들이 일본에 남긴 게 총과 빵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들이 임진란 때 사용한 조총은 바로 스페인과 이웃한 포르투갈 사람들이 전해준 최신 무기였다.

1592년, 이 신무기에 동래부사 송상용을 시발로 신립, 이순신, 권율 등 조선의 장수들과 그들보다 더 소중한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얼마나 떨었던가. 그래놓고도 대원군이 집권하던 19세기 말 서양세력이 몰려오자 솜으로 옷을 지어 총알을 막는다는 구상에 몰두했던 게 우리 역사다. 1592년으로부터 무려 3백년 가까이 지난 다음에도.

바로 이 이베리아인들이 쓰던 머스켓 소총, 즉 단발식 소총이 부채와의 기브앤드 테이크로 일본에 전해진 문물임을 발견하고 나는 전율을 느꼈다. 전율을 보탠 것은 이 머스켓 소총에서 나온 총알이 비슷한 시기 남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오스의 몸에도 박혔다는 사실이다. 16세기말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거의 모든 남미의 토착 제국을 멸망시키고 내륙으로 진출하던 시기이다.

머스켓 소총과 황인종의 惡緣(악연). 일본만 예외인 게 또 하나의 포인트일 것이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인 등 이베리아 인들은 일본에 빵도 남겼다. 스페인어로 빵은 팡(pan)이다. 포르투갈어도 비슷하다. 팡이 빵으로 변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카스테라, 어린 시절 빵보다 고급이고, 과자보다도 달콤한 추억으로 다가오는 카스테라는 스페인의 중심 왕국인 카스틸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읽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가 안정세로 들어선 17세기 초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심이 된 서양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을 억제하고 종국에는 쇄국으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그들은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일부 항구를 제한적으로 개방해 서양의 신문물을 도입했으니 당시의 주역은 이베리아인이 아닌 이제 막 세계의 또 다른 장사꾼으로 등장한 네덜란드인들이다. 일본인들이 개화기 이전까지 서양학문을 일컬어 부르던 이른바 蘭學(난학)은 화란의 학문을 일컫는다. 그들은 나가사키를 통해 심지어 해부학 같은 서양의 신식 학문을 계속적으로 도입했고 이는 19세기말 보다 유연한 자세로 개국하는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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