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념 부총리 '공평과세론'과
영어 교사의 국세청 앞 시위

등록 2001.01.30 19:34수정 2001.01.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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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100인 릴레이 25번째 박정호 씨가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진념 부총리가 국세청에 도착했다. ⓒ 김가연


진념 경제부총리는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 참석하면서 국세청 정문이 아닌 뒷문 출입구로 들어갔다.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시각 정문에서는 박정호(42) 씨가 참여연대 100인 릴레이 시위 25번째 주자로 나서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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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0일, 오후 1시 50분. "그들의 세금, 더 이상 대신 낼 수 없습니다. 삼성변칙 증여 국세청은 즉각 과세하라"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박종호 씨는 국세청 뒷문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호가 왔는지 안정남 국세청장이 뒷문을 열고 나와 섰고 곧 이어 '경기 47 나 7757' 번호판을 단 검은색 다이너스티가 진입했다.

다이너스티에서 내린 진념 부총리는 안정남 국세청장과 "어서 오십시오" "반갑습니다"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았다. 진념 부총리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박정호 씨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뒷문을 통과해 14층 국세청장실로 올라갔다.


영어 교사가 국세청 정문 앞에 선 까닭

ⓒ 오마이뉴스 이종호
참여연대 100인 릴레이 시위 25번째 주자로 나선 박정호 씨는 84년부터 교편을 잡은 석관고등학교 영어교사다. 박정호 선생님, 그는 왜 30일 피켓을 들고 국세청 정문 앞에 섰을까.


"3년 전부터 참여연대 회원이었지만 활동에 참여하지 못해 늘 아쉬웠어요. 참여연대에서 재벌의 변칙증여에 대해 세금을 추징해야 한다는 100인 시위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학을 이용해 참가하게 됐지요."

그는 자신의 집 전화번호도 제대로 못 외울 정도로 숫자에 둔하다. 숫자에 둔하다 보니 세금 처리 같은 것은 국가에서 알아서 해주겠지 하고 생각하곤 했었다. 그런데 작년에 노원세무서와 도봉세무서에서 세금계산이 잘못됐다고 두 차례나 환급 받은 경험을 했다.


"그런 일 겪고 보니까 세무행정이 제대로 되고 있는지 의심이 되더라구요. 시정되지 않았다면 까맣게 모르게 지나갔을 일이잖아요. 정말 내가 나서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벌의 변칙증여에 대해 세금이 제대로 추징되지 않았다면 다시 해야 합니다. 관련법령이 없다면 제정해서라도 제대로 된 세금을 물려야 해요."

30분 동안 국세청 정문 앞에 서 있으면서 그는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왜 이곳에 서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숫자에 약한 사람이지만 박정호 씨는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성심 성의껏 삼성의 변칙 증여에 대해 설명했다. 지나가는 아저씨, 할아버지는 그에게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참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정말 수고한다."

"거창하게 의미부여하지 마세요. 그냥 저는 '공평과세'가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릴레이 시위에 참여하게 됐던 겁니다."

▲지나가던 행인이 박씨의 시위 취지를 들은 뒤, 장한 일을 하고 있다며 박수를 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국세 공무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릴레이 1인 시위가 열렸던 시각. 국세청 1204호 강당에는 '전국세무관서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일선 세무서 '장'들이 모여 있었다.

강당 정문에는 190여명의 세무공무원들의 자리를 지정한 '전국세무서장회의 좌석배치도'가 붙어 있었다. 가장 상석인 단상 좌측에는 부총리, 우측에는 국세청장의 자리가 마련돼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바로 다음이어선지, 진념 부총리를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인지 군데군데에서 졸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일제히 양복에 넥타이를 메고 왼쪽 가슴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빈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진념 부총리가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사진 왼쪽) /진념 부총리와 안정남 국세청장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오후 2시 10분. 사회자가 참석자들에게 몇 가지를 부탁했다.
"휴대폰은 진동으로 하거나 꺼주시고, 보도자료 이외에는 보안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자, 세 번 박수를 치시면 됩니다. 부총리께서 입장하실 때, 부총리의 치사가 끝날 때 그리고 부총리가 나갈 때입니다."

오후 2시 40분. "부총리께서 입장하십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자 기립한 참석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국민의례, 애국가 4절까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바로 이어진 순서는 바로 부총리의 치사(致辭).

▲전국세무관서장 회의를 끝마친 뒤, 진념 부총리와 안정남 국세청장이 세무관서장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사진 위) 전국의 세무관서장들이 복도 양쪽에 늘어서서 회의장을 나서는 진 부총리에게 박수를 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먼저 지난 한해,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약 12조원의 세수를 초과 달성함으로써 구조 조정과 생산적 복지의 구현을 위한 재원을 원활하게 확보해 주신 국세 공무원 여러분의 노고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안정남 청장 이하 전 직원이 합심하여 과감한 세정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여러 차례에 걸쳐 공공부분 개혁과 부정부패추방의 최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등 큰 성과를 거양한 것에 대하여도 진심으로 치하를 드립니다."

국세공무원들에 대한 치하로 시작된 치사에서 진념 부총리는 국세공무원들에게 네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는 성실한 납세자를 보호하고 고액재산가의 음성·탈루소득에 대해 철저히 과세하여 소득 계층간·종류간 세부담의 형평을 제고함으로써 공평과세를 통한 조세정의실현을, 두번째는 인터넷을 이용한 신고·납부 등 전자세정을 구현하여 디지털·정보화시대에 부응하는 세정운영체제 구축을, 셋째 하드웨어 개혁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혁을, 넷째 외환거래 전면자유화 및 예금부분보장제도 등으로 인해 생기는 국부의 해외유출에 대한 국세청의 역할 강조가 그것이다.

진념 부총리는 '공평과세를 통한 조세정의실현'을 국세공무원에게 당부하는 첫번째 과제로 꼽았다. 그러나 부총리가 '공평과세를 통한 조세정의실현'을 강조한 2001년 1월 30일에도 국세청 정문 앞에서는 "그들의 세금, 더 이상 대신 낼 수 없습니다. 삼성변칙 증여 국세청은 즉각 과세하라"는 피켓을 든 1인 시위는 계속됐다.

진념 부총리의 치사가 끝나자 약속대로 또 한번의 박수가 터졌고 그가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강당을 빠져나오자 또 한번의 예정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 참석자들은 국세청 정문 앞에서 진념 부총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국세청 앞에서 진념 부총리와 세무관서장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들이 내년 이 자리에서 '공평과세를 통한 조세정의실현'을 해냈다고 기념할 수 있을까. ⓒ 오마이뉴스 이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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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오마이뉴스 정신을 신뢰합니다. 2000년 3월, 오마이뉴스에 입사해 취재부와 편집부에서 일했습니다. 2022년 4월부터 뉴스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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