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1.02.24 18:59수정 2001.02.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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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문 앞에 배달된 신문을 읽다가 '아 - 그래, 세상에서 가장 착한 젊은이들을 잊고 살았구나!'하며 무릎을 쳤다. 어느 성우의 아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평화와 비폭력을 지킨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기사였다. 소위 '여호아의증인'을 믿는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겪는 심적 물리적 고통을 가깝게 지켜본 나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때 그들과 군번 없는 허름한 군복에 짬밥을 함께 먹고 열띤 논쟁을 벌였던 시절이 있었다. 30도를 오르내리는 푹푹 찌는 군대 형무계 영창에서 그들과 뒹굴었던 넉달의 시간이 1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 한걸음에 달려왔다. 이제 이름도 잊고 얼굴도 가물거리지만 어찌 잊을 수 있을까.
91년 5월 안동대 후배인 영균이가 '노태우독재타도, 공안통치분쇄'를 외치며 분신을 결행한 그 때, 난 인근의 공군부대에서 막 단기사병 보상병 계급장을 달고 고참노릇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외박 나갔던 고참이 들어오며 "유 상병, 버스 안에서 뉴스를 들었는데, 안동에서 대학생이 분신했다던데…" 그 순간 갑자기 숨이 차 올라 심장은 쿵쾅거렸고 담배 한 개피를 빼물고 연신 빨기만 했다.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니 너무나 좋아했던 학과 후배였다.
다른 핑계를 대고 조기퇴근 후 안동으로 내달렸지만, 격렬한 시위장 근처에서 죄지은 사람처럼 얼씬거리기만 할 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찢어지는 아픔에 내리 소주잔만 움켜 잡았다. 그후 친구들이 안기부요원들에 의해 갑자기 사라지기 시작했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조직사건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두 번째 문제이고 예천성당에서 개최된 '공안통치 분쇄를 위한 군민대회'에 참석해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6월 말, 돌아가신 아버지 소상을 치르고 출근한 부대근무지 분위기가 갑자기 서늘했다. 오후 1시경 시커먼 양복을 입은 사내 5명이 들이닥쳐 다짜고짜 수갑을 채우더니 부대기무사로 연행했고 곧바로 대구 기무사(일명 태백공사)로 향했다. 그곳 지하 취조실에서 20일을 지냈다. 기억하기도 싫은 그곳을 나온 후 부대 영창에서 군법무관과 다시 말씨름을 하며 독방생활에 밤잠을 설치던 때 세상에서 가장 착한 젊은이들을 만난 것이다.
그들은 왠지 나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집총과 군복수령을 거부하며 당당히 쇠창살 안으로 들어온 그들이 무모해 보였고 구름 위를 헤매는 듯 자신들의 신념을 읊조리는 것에 짜증이 났다. 며칠이 지나고 책 읽을 기회가 다가오자 그들은 성경책 한 권으로 그 뜨거운 여름을 견뎌냈다. 내 옆에는 '양들의 침묵'에서부터 '로마사'까지 다양한 서적들이 허리만큼 쌓여있었지만 그들은 오로지 성경 속에서 모든 것을 찾고 있었다.
혼자 지내 무료하던 차 서로 탐색을 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며 일주일이 지났다. 그 후 친숙해지자마자 우리들은 격렬한 논쟁을 벌이며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설전을 치뤘다. 나는 그들이 성경에서 해석해내는 세상의 삶과 행동에 대해 새삼 놀라기 시작했고 답답하던 마음을 풀기 위해 더욱 논쟁에 불을 지폈다. 보초를 서던 헌병은 "야 임마, 옛날 같으면 너들은 총살감이야" 하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 말에 착한 젊은이들은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양심의 결정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고 답변했고 급기야 따귀까지 맞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난 "야 **들아, 사단장 지시로 군내 폭력이 금지됐는데 같이 깜빵 살고 싶어. 어디 해 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깡다구를 부렸다. 그네들과는 논쟁을 벌이다 벌이다 결국 "그래 너들은 하늘 위에서 평등세상을 건설해라. 우린 지상의 평등세상을 건설 할 테니까. 그렇게 양쪽 다 좋은 세계를 만들자"고 절충을 해 버렸다.
그네들의 영향으로 매주 빵과 사과를 들고 허기에 시달리는 우릴 유혹하던 군목의 기도회를 거부한 것은 엄청난 나의 변화였다. 물신팽배주의와 기복주의에 빠진 기성교회가 더욱 보기 싫어졌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 정도의 착한 마음을 가지고 양심으로만 삶을 실천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좋은 세상이 올 수도 있다고 믿게 됐다. 그 후 재판이 있고 그들은 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잘 가. 그곳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그리고 사회에 나오면 연락해" "유 상병님, 그 동안 고마웠습니다"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며칠 뒤 내가 머물고 있는 독방에 다른 젊은 여호아증인들이 들어왔다. 그렇게 그해 초겨울까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양심에 따라 생활하는 그들과 2평 짜리 작은 공간에서 함께 뒹굴었다. 그후 양심에 따라 행동을 다하지 못하고 10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과의 기이한 짦은 만남을 통해 큰 충격을 받았던 그때 그 자리가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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